이젠 친구가 아닌 적으로.
지금 현재, 밤나무 숲.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토리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며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그토록 찾고 기다리던 솔이가..
지금 눈앞에 있었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어
험상궂게 보이는 인상이 되었지만
어릴 적 솔이가 분명했습니다.
'솔아,, 너 솔이 맞지?'
토리는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점점 다가갔습니다.
오랜 세월 가슴 깊은 곳에서 웅크리며 견뎌온
어린 토리의 기다림과 간절한 소망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애절한 토리에 비해,
놀랍도록 차가운 '그' 청설모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대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옛날 함께 놀던 때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공허하고 차가운 눈빛만이
토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솔이라.. 이름 한 번 유치하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토리의 가슴에 고드름처럼 꽂혔습니다.
'저 표정. 저 말투는..
내가 어릴 적 알던 솔이가 아니야.
왜? 어째서 날 기억 못 하는 거지?'
토리는 올라오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며
다시 말했습니다.
'나.. 누군지 잘 모르겠어?
나 토리야. 토리.
우리 같은 옆집에 살았잖아.'
'어릴 적에 가장 친한 친구, 토리.
나 기억 안 나?'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표정 없이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네가 누군지, 솔이가 누구였는지는
아무 관심 없다.
여긴 이제 우리 숲이니 눈앞에서 사라져.
가서 모든 마을에 전해라.
우리가 곧 간다고.
그렇게 말하고 씩 웃는 그의 얼굴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어두움만이 느껴지는 그 말과 표정에
토리는 깊은 절망감마저 느꼈습니다.
토리는 연이어 날아오는 차가운 고드름 같은 것이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왜.. 어째서..?'
바로 옆에 있던 토끼 비온이
옷깃을 잡아끌며 어서 가자고 눈짓했습니다.
토리는 이대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솔이였는데..
하지만.. 하지만..
토리는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솔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집으로 돌아온 남편들을 보고
아내들이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그리고 왜 빈 손으로 왔어요?'
토리는 아무 말없이 아내 리나 앞을 지나가더니
의자에 힘 없이 풀썩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리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얼굴로
함께 동행했던 비온을 쳐다보았습니다.
비온은 눈치를 보더니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게.. 저 반대편 숲에 청설모들이 있었어요..'
'청설모들이라고요?'
리나는 놀란 표정이 되어 되물었습니다.
'아니, 청설모들은 청설모들이고 밤은 어떻게 했어요?
청설모 몇 마리쯤 있어도 밤을 들고 와야지요!!'
나무라듯이 아내 토끼 루리가 말했습니다.
'그게.. 몇 마리가 아니고..
몇 백 마리는 된 거 같았어.'
'몇 백 마리요??'
이윽고 루리의 눈도 휘둥그레졌습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토리가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이젠.. 밤 가게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뭐라고요? 아니, 무슨 상한 도토리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하게 말해봐요!!'
리나가 다그치자 침울한 표정의
토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솔이가.. 돌아왔어.
이젠 친구가 아닌.. 적으로.'
'솔이.. 당신이 어릴 적에 헤어졌다던 그 친구요?
그렇게 찾아 헤매더니, 드디어 만난 거예요?
당신을 알아보던가요? 근데 적이라니요?'
'옛날 기억을 잃어버린 건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
'전혀요?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못 알아본건 아니고?'
'세월이 흘러 변하긴 했지만 친구의 얼굴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어.
그런데.. 그 공허하고 차가운 얼굴은..
어릴 적 친구가 아니었어.'
'아.. 힘든 세월을 살았으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적으로 돌아왔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이제 모두 짐을 싸서 어딘가 멀리 가야 할 것 같아.
아까 그 친구가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말을 했거든.
'무슨 말을 했는데요?'
'모든 마을에 전하라고 했어.
우리가 곧 간다고.'
토끼 루리가 억울한 듯 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니, 그 말 한마디에 다른 곳에 이사 간다고요?
얼마 전에 아파트도 대출받아서 샀다면서요.
밤 가게도 막 시작해서 한창 잘되는 중이었는데...'
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밤가게나 도토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그 냉혹한 얼굴과 분위기가 심상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래도 여긴
숲치안대 경찰들이 지키고 있잖아요.
올빼미 서장부터 고슴도치 경관들,
너구리 형사들까지 얼마나 많아요.
청설모들이 온다고 해도
쉽게 여기를 어쩌지는 못할 거예요.'
루리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요. 우리 일단 숲치안대에 가서
올빼미 서장한테 말해봐요.
정말 청설모들이 그렇게 많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닐 테니까요.
그 후에는 일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도 챙기고
사태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기로 해요.
리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숲치안대 건물에 들어서자
정말 많은 경찰들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안심이 되는
엄마들의 모습과는 반대로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아빠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청설모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올빼미 서장은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배가 완전 불룩 나온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아
모든 것이 귀찮다는 얼굴로
두 부부가 하는 말을 듣더니,
'여기 숲은 우리가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네 분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날, 토리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무서운 꿈을 꾸고는
다시 깨어나 거실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솔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솔이가 눈앞에 있었는데..'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자
토리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아침 해가 서서히 올라오면서 온 숲 속 나무 사이사이마다 붉은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진한 녹색 잎사귀마다 맺힌 이슬들은 밤새 담은 그리움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
힘없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머나먼 산들의 능선 위로 감도는 붉은 빛깔의 커튼은 오늘따라 유난히 진해 보였습니다.
토리는 주위의 색깔들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끼며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늘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는 세상 모든 색들이
평소보다 진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렬한 것들이 올 때는 늘 그랬습니다.
사랑도, 죽음도.
오늘은.. 사랑이 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고요해졌습니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흔들리던 잎사귀들도
모두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추었습니다.
공기마저 숨 죽이고 가만히 바라보던 그 순간,
토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습니다.
'저건.. 뭐지?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검은 실루엣이
하나둘씩 나타났습니다.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 온 지평선을 뒤덮었습니다.
토리는 그 모든 실루엣의 맨 앞에 서서
흔들림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지휘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토리의 어릴 적 친구, 지금은 적이 되어 돌아온..
솔이였습니다.
솔이와 그의 군대가 진군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발자국 소리가
완벽하게 하나 된 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아니.. 저렇게나 많이..'
숲에서 보았던 청설모들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아진 군대의 모습에
토리는 공포로 뒤덮인 얼굴이 되어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여.. 여보!! 리나!!'
어느새 솔이와 그의 군대가 아파트 중앙 광장에
빽빽이 모였습니다.
곧 온 아파트에 안내방송으로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렸습니다.
'나는 붉은발톱군단의 대장 루인이다!
오늘부터 이 숲은 우리가 통제한다!
이 시간 이후로 나의 부하들이 집을 방문할 것이다!
우리에게 충성의 표시로 도토리 한 자루씩을
바쳐야 한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계속 나더니
잠시 후 숲치안대가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빼미 서장을 비롯한 수많은 고슴도치 경찰들이
모여 청설모 군단과 대치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토리가 다시 가족들과
창문가로 왔을 때는
경찰들이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청설모 군대에게
숲치안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저기.. 내가 말하던.. 그가 군대를 끌고 왔어.
중간에 저 청설모가 바로 솔이야.'
순간, 솔이를 바라보던 리나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습니다.
'저..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하지만 창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토리는
유난히 공포에 떠는 아내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청설모 부하들이 흩어져 집집마다
도토리를 수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랑이를 하는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 군대의 위압감에
순순히 도토리를 내놓았습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리나가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우리 청설모들이 오기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요. 어서.'
모두 리나의 말에 부랴부랴 짐을 챙겼습니다.
토리는 남은 밤을 자루에 넣은 다음,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았습니다.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들.
3살 아들 이안과 5살 딸 하린이를
품에 꼭 안았습니다.
토리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집을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처음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왔던,
도토리 9000개의 대출로 샀던 이 집.
이젠 안녕이라고 속으로 말하며.
네 명의 가족은 그렇게 문을 닫고 밖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습니다.
'자, 어서 빨리 내려가요.'
온 가족이 내려가려는 찰나,
'쿵쿵 쿵쿵'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계단을 올라오는 네 개의 청설모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안돼.. 벌써..'
'어딜 그렇게 가는 거지?
흉터가 있는 험상궂게 생긴 청설모가
붉은 띠를 날리며 물었습니다.
'아, 그게 저..'
토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청설모가
토리의 손에 든 자루를 빼앗으며 말했습니다.
'오, 도토리가 든 자루로군. 이리 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건 우리 애들 먹일 꺼라고요!!'
리나가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덩치 큰 청설모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무섭게 노려보았습니다.
'감히.. 지금 우리에게 대드는 건가?
우린 붉은발톱군단. 루인 장군이 이끄는
최정예 청설모 군단이다.
이건 반역..
'붉은발톱이든 붉은꽃게든 애들 먹을 거를
이렇게 뺏어가면 안 되죠!!'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그 사이에 토리가 재빨리 끼어들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아내는 아직 어린 애들이
걱정이 돼서 그만..
자, 여기 도토리가 또 있으니 가져가시고
노여움을 푸세요.'
토리는 또 다른 도토리 자루를 꺼내서 바치듯이
청설모의 눈앞에 올려주었습니다.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던 청설모는
도토리 자루를 확 낚아채며,
'앞으로는 조심해.'
하고는 또 다른 집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휴..'
토리가 안도의 한숨을 쉬자
리나가 새침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또 언제 도토리 숨겨놓았어요?'
'아.. 이거 비상금으로 숨겨둔 거야.. 헤헷.'
멋쩍게 웃는 토리의 앞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드리워졌습니다.
아까 그 청설모들이 다시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토리를 거칠게 땅바닥에 엎드리게 하고는
두 손을 끈으로 묶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방금 주었던 자루에 밤이 들어있더군.
밤을 가진 자는 즉시 체포하라는 대장의 명령이다.'
'아니, 밤, 무슨 밤 가진 게 죄예요?'
어느덧 나와서 보고 있던 옆집 주민들이
청설모에게 소리치며 달려드는 리나를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쉿 쉿!!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 이럴 수는 없어!!!'
'아빠~~ 아빠!!'
절박하게 소리를 지르는 리나와 아이들을 뒤로하고 토리는 손이 묶인 채
청설모들에게 끌려갔습니다.
토리는 미안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
안타까운 모든 마음이 섞인 눈으로
리나를 바라보고 아이들을 바라보고는
계단 밑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리나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옆에는 언제 어딘가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도토리 한 개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청설모 군대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한참을 울던 리나는 눈물을 그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안을 안고 하린이의 손을 잡고 뛰었습니다.
리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토끼 루리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남편이 잡혀간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두 명의 아이를 한참 동안 꼭 안아준다음,
루리네 집을 나섰습니다.
'하린아, 이안아 사랑해.
엄마가 아빠 구해서 금방 다시 돌아올게.'
토리가 창가에서 솔이의 모습을 가리켰을 때
리나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듯했습니다.
누군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잔인한 악당..
저 자가 여기 왔다면 배후에는
분명 '그'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솔이는 그의 꼭두각시 지휘관에 불과했습니다.
토리도 만난 적이 있는 그 자.
모든 숲을 지배하려는 자.
카르.
잡은 토리를 분명 카르에게로
데려가리라는 걸,
리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빠르게 뛰어가던 리나는
숲 속의 한 표식이 있는 나무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 아래 풀숲을 헤치자 땅으로 연결된
작은 문이 나왔습니다.
그 문을 열자 오래된 상자가 있었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옷과 무기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오래전, 리나는 숲 속 자경단으로
활약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일 위에 있던 붉은 머리끈을 들었습니다.
머리끈을 질끈 묶고 난 리나는,
너무나 잘 아는 길이라는 듯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옛날 생각나네. 그때처럼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볼까.
당신, 내가 구하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
(다음 편 '옛 동료들을 찾아서'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