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인연
'아까 낮에 병원에서 자네의 모습을 봤었네.
정말 청설모 친구를 그렇게 찾고 싶나?'
'네!! 꼭 찾고 싶어요!!'
토리가 강렬한 눈빛으로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말해주겠네.
이 도시의 동쪽 끝을 넘어가면 거대한 숲이 나온다네.
도시와 숲의 경계선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오후에 약속이 있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지.
그런데 웬 청설모 한 마리가 불안한 듯
서성이고 있었어.
자네 나이 또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았다네.
시냇가에서 뭘 찾고 있는지 물었더니
돌을 찾고 있다고 하더군.
난 그렇게 다 큰 청설모가 시냇가에서
돌을 찾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 그냥 말없이 지나갔다네.
토리는 시냇가라는 말과 돌을 찾고 있는
청설모라는 말을 듣는 순간,
솔이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이 떨렸습니다.
'그.. 숲이 어디에 있나요?'
'이쪽 방향으로 쭉 가면 도시가 끝나는 길에
커다란 숲이 보일 거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토리는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여우가 가르쳐준 방향을 향해 얼른 뛰어갔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던 도시의 끝자락은
낮에 보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오소리 가족이나
데이트를 즐기는 고슴도치 커플들이 보일 뿐,
주위 풍경도 점차 조용해져 갔습니다.
지금은 마치 고요했던 어릴 적 시골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 역시 난 숲이 좋아.'
드디어 저 멀리 여우가 말했던
시냇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놀던 시냇가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네!!
솔이가 정말로 여기에 왔을까?
토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시냇가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고요한 밤의 숨소리와
왠지 모를 서늘함만이 있을 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늦은 걸까.'
토리는 시냇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근처에 가득한 덤불을 바라보며 서있었습니다.
어두운 밤 달빛마저 조용하게 비치던 그때,
갑자기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순간 토리의 귀가 쫑긋 서면서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토리는
조금씩 덤불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부스럭대며 흔들거리던 덤불에서
무언가 검은 형체가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악!! 족제비다!!
토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부리나케 달렸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지만,
족제비가 얼마나 빨랐던지
순식간에 바짝 따라왔습니다.
'아, 이러다 잡히겠어!!
토리는 달리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방향을 틀어 나무들이 울창한 깊은 숲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무성하게 가지가 많은
큰 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저기다. 저기로 올라가야겠다!'
얼른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나무에 발을 얹고
위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토리의 멋진 커다란 꼬리가
뒤따라 빠르게 달려온 족제비에게
그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아악!! 도와주세요!!'
토리가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동그란 주머니가
족제비의 얼굴에 맞은 것은.
곧 주머니에서 연기 같은 것이 퍼지더니,
족제비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 안았습니다.
토리가 어리둥절해서 보고 있으니,
연기 가운데서 한 그림자가 나타나
토리의 손을 잡고 외쳤습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뛰어!!'
그제야 토리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연기가 사라지고 환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림자의 정체를 알게 되자
토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와 같은 다람쥐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토리는 난생처음 보는
같은 또래의 여자 다람쥐였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그녀는 갑자기
어떤 표시가 있는 나무에 이르자 멈추어섰습니다.
고요한 어떤 힘이 담긴 강렬한 눈빛으로
돌아보았을 때, 순간 토리는
숲의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갈색 털의 윤기,
숲 속의 밤처럼 진하게 까만 눈동자,
언젠가 꿈결처럼 보았던 초승달처럼
얇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눈썹,
숲 속 깊숙한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갈색 머리털을 부드럽게 흩날리는 모습까지
토리는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켰습니다.
저 손.
아까 연기 속에서 토리를 끌어서 잡아준,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저 손.
숲의 바람은 그렇게 다시 한번 손을 스치듯
지나갔고, 토리의 심장마저 떨리게 해 주었습니다.
안도감, 고마움, 설렘 이 모든 마음들이 뒤섞여
토리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아까 불어온 차가운 밤의 바람이
토리의 입마저 떨리게 만든 건지 모릅니다.
'여기로 올라가. 이 나무에는 쉴 곳도 있고
먹을 것도 있어.
족제비가 싫어하는 향 주머니를
주위에 매달아 놓았으니 여긴 안전해.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날이 밝으면 너 가던 길로 바로 떠나.'
영원처럼 느껴지던 짧은 침묵의 시간이 사라지자,
밤색깔을 닮은 그녀의 코를 멍하니 보던
토리는 어느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 가봐야 해.
그럼 이만!!'
'아, 저..'
토리는 결국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멀어지는 뒷모습만 쳐다보며 한참을 서있었습니다.
이윽고 토리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
나무 위로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그 위에는 정말 넓은 터가 있었고
쉴 곳도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음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토리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음식을 보자마자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져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습니다.
'휴, 이제야 배가 좀 부르네!'
좀 전까지만 해도 양볼이 터지도록
음식을 입에 넣던 토리는
이제 지친 몸을 자리에 털썩 뉘었습니다.
'겨우 도시에 온 지 하루 만에 별별 일이 다 생기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여우, 족제비와
한 패였던 것이 분명해!!
애초에 청설모를 봤다는 말도 거짓말이 분명해!
못된 녀석들 같으니라고!!
내가 다신 이렇게 속나 봐라!
한참을 씩씩거리던 토리는 갑자기
여기 온 이유가 생각이 났다는 듯 조용해졌습니다.
'아, 그나저나 내일은 어디에 가서 솔이를 찾지..'
이런저런 생각의 끝자락에서
아까 만났던 여자 다람쥐가 떠올랐습니다.
토리의 눈에 비쳤던 그녀의 모습은..
'급하게 뛰어가던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분명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내일 또.. 만났으면 좋겠다. 우연하게라도.'
토리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토리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헉! 왜 자꾸 그 여자 생각이 나지!! 왜? 왜?
안 되겠다. 빨리 잠이나 자야지!!'
토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눈을 꾸욱 감았습니다.
하루 종일 걷고 뛰고 했던 토리는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토리의 바람대로 내일 다시 만나게 될 것도,
그녀와의 인연이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토리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달빛마저 고요하게 비치는 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살랑이는 나뭇잎은
숲의 숨결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실어주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수백 개의 생명들이
꾸는 꿈처럼 반짝거렸고,
그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조차
오로라가 되고 싶은 꿈을 꾸듯
깊은 잠에 빠져드는 밤이었습니다.
토리가 서있었던 시냇가는 마치
은하수가 흘러가는 것처럼
달빛에 반짝이며 은은한 강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시냇가를 따라 흘러가던 달빛은
토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개울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 쌓은 게 분명한 돌멩이들과
주위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청설모의 발자국이,
환하게 비추는 달빛에 반들거리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 '이젠 친구가 아닌 적'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