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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뵤뵤리나 Dec 28. 2024

취중 연애편지

feat. 취한 듯 안 취한 듯 제정신으로 고백하기

여보! 

세에상에 당신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당최 얼마만이야아.

오랜만이라서 미안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설레기도 하고 쫌 그러네?

의견 다툼으로 서로 으르렁 거릴 때 아이가 보고 들을까 봐 조심하잖아 우리.

장문의 카톡으로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던 게 결코 편지는 아닐 테고 그렇지?


어, 미안. 격앙된 문체에 놀랐구나.

한잔 했냐고? 흠흠, 쪼오끔 마셨어.

걱정 마. 우리 기특한 딸내미는 엄마 글 쓴다고 읽을 책 들고 

"엄마, 글팅!"을 외치고 방에 들어갔으니까.

글팅이 뭐냐고? 글쓰기 파이팅이래. 요즘 말 줄이는데 꽂혔잖아. 

참나, 별다줄.(별 걸 다 줄인다의 줄임말입니다)

엄마가 작가인데 이래도 되냐고? 괜찮아, 이렇게 날 것으로 써서 발행하는 경험은 오늘뿐이잖아.

난 매 순간이 소중하고, 그러기에 즐기고 싶은 사람이니까 

이 철없는 가벼움도 지금만큼은 용감하게 꺼내볼래.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여보한테 편지를 쓸 생각을 했을까.

며칠 전에 여보가 보인 약한 모습이 

회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글을 쓰다가,

자꾸만 문득 떠올라서 눈시울이 붉어지게 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만 같은 결단력과 

킬리만자로의 표범같이 강인할 것만 같던 

당신이 수년만에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잖아.

저 사람 분명 내색은 안 하지만 속은 말이 아닐 텐데 생각하면서도 

내가 먼저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건 왠지 겁나더라고.

아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여주는 걸 싫어하는 여보니까 나도 조심스러웠어.


상견례 프리패스상인 단정한 외모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고스란히 물려주신

존경하는 아버님, 내 시아버님.

아버님이 요즘 부쩍 위독해지셨지. 암 진단을 받으시고 5년이 됐지, 아마.

그래도 좋아하던 음식도 드시고, 산책도 하시는 모습보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실 거라 믿었는데.

요즘 부쩍 그 믿음이 사그라들 정도로 약해지신 걸 보고 많이 놀랬지.


지난번에 여보 손에 들려준 편지에서처럼

아버님은 내게도 두껍고 단단한 뿌리를 내린 나무 같으셔.

나무처럼 언제고 든든하게 곁에 계실 것 같은 

아버님의 쇠약해진 전화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눈물이 나는데 당신 마음은 오죽할까.

여보 역시 똑 닮았어. 아버님과.

속에 아무리 괴로움이 들어차 있더라도 아이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는 것 없이 

짓궂은 장난꾸러기 아빠잖아.

형제 없는 외동이니 경쟁해서 쟁취하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 

만사가 쉽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를 깨우쳐주기 위해 

과자 한 조각과 초콜릿으로 아이와 싸우는 걸 보면 

이 사람 대체 왜 이러나,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서 감사해. 당신 덕분에 우리웃을 수 있어.

 

여보, 지난번에 같이 부둥켜안고 울면서 얘기했잖아.

내 앞에서는 약한 모습 보여도 된다고.

사실 난 기다리고 있었어.

당신의 고백을. 

앞으로 예정된 이별이 다가오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으니 

그땐 아이가 영향을 받지 않도록 지탱해 달라고 부탁했지.

늘 나무처럼 우리를 지탱해 주는 당신이니까 

이제는 우리 차례야.

딸 둘 키우는 기분이라며 너털웃음 짓던 당신 사랑을 먹고

우리도 제법 단단해졌거든.    

그러니까 걱정 마. 걱정 말고 오늘도 잘 다녀와.

지금쯤 자고 있을지 모르겠다. 

잘 자고 내일 봐요. 

굿 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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