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작은 도시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바깥세상에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는 작고 소박하고 답답한 여기보다 더 화려하고 멋지고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 그래서인지 마음이 찌릿찌릿해지는 로맨스 소설 말고는 쳐다도 안 보던 여고시절에도 가장 많이 보았던 책이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한비야의 세계일주 시리즈였다. 그 책들을 몇 번이고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한비야처럼 자유롭게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한비야가 들려주는 지도 밖의 이야기는 마치 성인이 되면 누리는 특권인 음주나 연애처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해서 신비롭고 궁금한 어떤 것이었다.
그렇게 설렘 가득 떠났던 아빠와의유럽여행에서 나의 환상은 처참히 산산조각 났다. 여행의 쓰디쓴 맛을 제대로 경험했으니, "내 생애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가 되어야 바람직한 결말인데,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유럽을 다녀온 후 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있었다.
첫사랑에게 대차게 차인 후 다시는 사랑 따위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지만,똥차 가면 벤츠온다는 속설에 마음을 기대는 것처럼.
대학생이던 나는 수중에 돈은 없고 여행은 떠나고 싶으니 어쩔 수 없이 나의 유일한 돈줄,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 솔직히 나는 국립대학 다니니까 등록금도 얼마 안내잖아. 집에서 학교 다니니까 따로 기숙사비나 자취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용돈은 내가 과외해서 내가 쓰는데. 솔직히 지호(동생)는 서울에, 그것도 사립대학을 다니는데 거기에 드는 돈에 비하면 나는 정말 공짜로 키우는 거 아니야?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 안 가고 싶어서 안 간 것도 아니고 엄마가 교대가라고 설득했잖아? 내가 사립대학 안 가고 교대에 간 거만으로 엄마 돈 굳은 거지. 그러니까.. 나 여행 가고 싶으니까 돈 좀 줘"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못되고 철딱서니 없는 딸이 바로 나였다. 당연히 엄마에게 등짝스매싱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의외로 쿨하게 여행자금을 건네주었다. 그것도 1년에 한 번씩 거금의 여행자금을.
(몇 년뒤 엄마에게 왜 여행경비를 주었냐고 물었더니 내가 없는 그 한 달이 좋았단다. 다 큰 대학생 딸이랑 한집에서 살며 밥 때되면 밥 해주는 것도 귀찮은데 집에 언제 들어오나 신경 쓰이는 것도 스트레스라고. 내가 여행 가면 그 고생을 안 하니 돈을 더 줘서라도 여행을 보내고 싶었다고. 아니, 이건 자주 듣던 소리인데. 그렇다. 아빠가 여행을 가면 엄마가 좋아하던 이유. 참나... 이렇게 엄마에게 아빠와 동급이 되다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으나 돈을 받아먹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엄마에게 여행자금을 지원받기로 하자마자 다음 여행 장소를 정하고 함께 떠날 친구를 찾았다. 고등학교 시절 언제 떠날지도 모르면서 함께 [론니플래닛]을 보던 내 친구.
우리가 처음으로 떠나기로 한 곳은 태국 방콕이었다. 매일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여행 가이드북을 훑어보던 우리는 물가가 일단 저렴했고, 다른 동남아보다 안전했으며, 도시의 북적거림과 휴양지에서 여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태국을 첫 여행지로 픽했다. 고백에 성공하고 첫 데이트를 하는 마음으로 도착한 방콕의 카오산로드. 그러나 짝사랑은 혼자 했을 때 더 아름다운 법이던가. 배낭여행객의 성지라 불리는 카오산은 다른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딘 나에게 카오스 그 자체였다.
자정이 되도록 반짝이는 불빛들과 시끌벅적한 음악이 멈추지 않는 거리, 그 속에서 한 손에는 맥주와 다른 손에는 담배를 물고 떠들던 외국인들. 대한민국 남쪽 끝 작은 도시에서 공부만 하며 자라온 우리는 그 놀라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해만 지면 숙소 문을 걸어 잠그고는 "여기는 너무 무섭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며 여행 온 것을 후회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나쁜 남자에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듯 우리도 서서히 시끌벅적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방콕의 시간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여행은 내게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주었다. 엄마의 눈칫돈을 떠난 여행이기에 아끼고 아껴야했던 여행은 힘들고 고되었지만, 여행을 다녀온 얼마간은 지난 여행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그다음의 시간들은 다음 여행을 계획하며 살았다. 연애도 자주 할수록 갈아타는 텀이 짧아지듯이 여행 또한 그러해서 처음엔 1년에 한 번씩 가던 여행을 이제는 학기마다 떠나게 되었다.
4학년이 되고서는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했고,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3월 발령을 받은 24살의 새내기교사에게 여행은 너무나 먼 '다가갈 수 없는 그대'가 되고말았다. 매일매일을 학교 업무에 치이고, 아이들에 치여 겨우 버티며 살아내고 있었다. 학교에서 퇴근해서 돌아오면 뻗어버리기 일쑤였고, 주말이고 방학이고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 몸은 좀처럼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년 동안 첫 사회생활을 보내고 나니 학교에 익숙해진 젊은 교사에게 방학은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교사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대학생 시절과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연애를 못하고 있었고, 퇴근 후 시간은 남아돌았고, 일 년에 꼬박꼬박 두 번의 방학은 주어졌다.
젊은 청춘에게 사실 더 간절한 건 여행이 아니라 연애였다. 나는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태솔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연애는 전교 1등보다 더 어려웠고, 내 주변의 남자들은 통장에 월급이 스쳐 지나가듯 나를 스쳐만 지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았고, 나를 좋다고 한 사람에게는 내 마음이 가질 않았다. 방구석에 앉아 연애도 못하는 스물다섯의 모태솔로가 될 바에는 차라리 여행을 떠나리라! 나는 임용고시와 학교생활에 지쳐 접어두었던 내 안의 여행 열정을 다시 하나하나 꺼내기시작했다.
그렇게 연애를 못해서 떠난 도피에 가까운 여행들. 나 빼고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하는 것 같은 쉬운 연애조차 못하고 있으니, 그 무료함과 쓸쓸함을 견디기에 가장 좋은 것이 여행이었다. 직장인에게 한 달 이상의 여행은 불가능하기에 짧게는 1박 3일, 길게는 2주 정도의 일정으로 비행기를 탔다. 특히 데이트하기 너무 좋은 계절이거나 커플 천국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내게는 함께 떠날 친구가 있었다. 우린 같은 교사였고, 그때까지 둘 다 모태솔로였고, 서로에게 좋은 여행메이트가 되어주었다. 여행지에서 힘들고 지쳐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함께 여행을 떠났으나 각자의 시간을 즐겨도 서로에게 서운하지 않았다. 점심이나 저녁때쯤 만나서 하루 한 끼 정도 같이 밥 먹고 오늘의 뻘짓들에 수다를 떨다가 다시 또 혼자만의 여행을 즐겨도 마음이 편한 사이. 여행은 함께할 때도 즐겁지만 혼자일 때 그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에, 나는 솔로였지만 혼자인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여행은 연애 대신 나의 청춘을 뜨겁게 해 주었다.
스물한 살, 카오산로드의 작은 게스트하우스 안에서 여긴 너무 무섭다며 내 옆에서 벌벌 떨던 그녀는 이제 완벽한 여행가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반면 스쳐만 지나가던 남자들 중 유일하게 한 달 이상을 버텨주던 그와3년간의 연애 끝에결혼을 했고 그렇게 나의 고독하고 찬란했던 청춘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