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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여사 Nov 15. 2024

여행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feat. 육아)

아이가 6개월쯤 되었을 무렵, 나는 산후우울증의 절정에 다다른 상태였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꼴 보기 싫었던 것은 물론이요, 매일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까지 꼴 보기 싫었다. 나도 매일 출근하고 싶은데, 나도 점심은 나가서 먹고 싶은데, 남편은 아이를 낳아도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 전의 일상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나는 왜 집구석에 처박혀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으며 아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감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제주도로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다.

아니, 출근하는 것도 못 봐주겠는데 출장을 간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제주도로 간다고? 남편에게 고작 며칠이지만 육아 휴가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가겠다고 선언했다.

너만 노는 꼴은 죽어도 못 봐.

나는 그렇게 아기띠를 메고 남편 출장을 따라나선 미친 여자가 되었다.


그래서 6개월 아이와 제주도에 가서 뭘 했냐고요?

네, 그냥 호텔에 있었습니다.


일단 산후우울증에 가장 특효약은 집 밖을 나서는 것이니, 그것으로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그것도 뜨거운 한 여름에 6개월 아기와 함께 둘이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남편은 학회에 참석하느라 아침이면 출근을 했고, 나는 제주도 호텔에서 평소와 같은 육아를 이어나갔다. 여기가 제주도인지 미국인지 달나라인지 전혀 모르는 비즈니스호텔에서 말이다.

해가 떠있는 시간은 호텔방에서 육아를 하고, 남편이 돌아온 저녁에는 호텔을 나서 제주도 공기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했었던 것 같다. '했었던 것 같다'인 이유는 여행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 놀았던 것은 정말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호텔에 들어앉아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며 남편은 언제 오나 핸드폰 시계만 쳐다보면 육아만 기억에 남는다.




사실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말이 여행이지, 현실은 그곳에서도 별다른 것이 없는 육아이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 되면 분유를 먹여야 하고, 싸면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고, 낮잠시간에 맞춰 여행 스케줄을 짜야하니 그 전의 자유롭고 어쩌면 심심하기까지 했던 그 전의 여행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여행이라 불러야 맞는지, 타지에서의 육아라고 불러야 맞는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여행과 육아가 혼합된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다.

하지만 집 안에서 오롯이 육아만 하는 것보다야 여행을 가면 고생은 더하지만 육아는 덜한다는 느낌이 있어 남편에게 어디든 가자고 졸랐다. 남편도 내가 집에서 투덜대는 것보다는 일단 어디든 데리고 나가면 온순한 양이되니 기꺼이 나를 데리고 가 주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육아여행 레벨이 업그레이드되자 드디어 아이와의 해외여행을 결심한 나.


아이가 17개월 되던 여름이었다. 24개월 전까지는 비행기가 공짜라던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잖아!

아이와 가기에 최적인 해외여행지, 어쨌든 미국 땅. 괌으로 간다. 출발 전 매일 블로그와 인스타를 뒤적이며 맛집, 핫플들을 저장해 둔다. 이곳들을 모두 다 가보지는 못해도 하루에 한 군데는 꼭 가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그러나 현실은 역시나.

우리는 괌 여행자라면 누구나 먹고온다는  에그 앤 띵스, 비췬 쉬림프 등의 모든 맛집들의 음식을 포장해서 호텔방안에서 먹었다. 아이를 데리고 굳이 줄 서서 식당에 앉아 허겁지겁 먹는 것보다, 맛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아이를 재우고 어두컴컴한 호텔방안에서 마음이라도 편하게 는 게 훨씬 좋았다. 쇼핑도 마찬가지. 하나는 아이를 보고 하나는 쇼핑을 하고,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면 역할 체인지. 4박 5일이면 충분한 괌 여행을 우리는 무려 일주일을 머물며 아이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여행을 마쳤다.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에는 오키나와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맑고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 위에서 아이와 신나게 놀다가 올 거라는 야심 찬 계획을 안고. 그런데 아이는 현지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열이 펄펄 끓었다. 물론 비상약을 챙겨갔지만 호전되지 않자 여행카페에서 검색 끝에 한국어를 조금 하신다는 의사 선생님이 계계신 현지 소아과를 겨우 찾아갔다. 오키나와 시내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 안에 너무나도 소박하고 어쩌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소아과였다. 그것이 내 생애 첫 해외 병원 방문이었다. 아들 덕분에 일본의 병원에도 다 가보는구나. 여행 하루 일정을 병원 진료로 날렸다. 통하지 않는 언어로 아이의 상태를 마디 주고받고, 약을 처방받고 30만 원을 냈다.  그리고 병원을 나서며 남편과 함께 외쳤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민국 만세. 다시는 아이를 데리고 여행가지 않으리."





다짐은 언제나 그때뿐. 오키나와에서 소아과까지 다녀왔으니 여행력 레벨업!

다음 해에는 이제 좀 큰 아이를 데리고 두 번째 괌 여행을 갔다. 역시 2년 전의 돌쟁이 아이의 여행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 우리는 맛집도 줄 서서 들어가서 먹을 수 있었고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고 여유롭게 쇼핑을 할 수도 있었다. 아이도 해변에서든 호텔 수영장에서든 잘 놀았다. 이제야 육아여행의 진수를 맛보는구나 싶었다.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여행 4일 차 되던 날 아이는 열이 나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계속 목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아들 입안을 들여다보니 수포가 올라왔다. 수족구였다. 한국에선 친구들 다 걸리던 수족구를 잘도 피해 가더니 하필 괌에 와서 걸릴게 뭐람. 그날로 물놀이 금지. 물놀이를 하지 못하는 괌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입안의 수포 때문에 아이는 물 마시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결국 우리는 예정된 일정을 2일이나 앞당겨 비싼 값 주고 산 비행기티켓을 비싼 값 주고 환불하고, 다행히 조금은 저렴한 티켓을 얻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우리 아들은 외국만 나가면 아프네. 이건 분명 이제 그만 다니라는 하늘의 계시야 "


쳇. 수족구 따위에 물러날 내가 아니지.


하지만 나의 원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 코로나 앞에 우리의 해외여행은 거기서 끝이 났다. 비록 여권 들고 떠나지는 못했지만 코로나 속에서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도 서서히 서로에게 완벽한 여행메이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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