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해외여행은 걷고 사진 찍고 맥도날드를 먹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브런치 첫 발행글을 수정하여 매거진 1화로 옮겨 발행합니다]
나의 아빠는 전형적인 무뚝뚝하고 표현 없는 경상도 남자이다. 나는 아빠와 일 년에 한두 번 어버이날, 생신 등 기념일이 아니면 특별히 통화를 하지도 않고, 통화 시간도 길어야 1분 남짓에서 끝이다. 아빠에게 들어본 다정한 말,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정말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없고, 보통의 딸이라면 아빠에게 들어봄직한 ‘예쁜 우리 딸~’ 정도로 시작하는 애정 어린 대화는 하나도 없었다. 아빠가 내게 해준 칭찬 수준의 표현은
“니는 보통이다. 딱 그 정도면 됐다.”
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아빠와의 기억은 한 집에서 같이 먹고 자며 일상을 나누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정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편은 우리 부녀를 보고 어쩜 아빠와 딸이 이렇게 친하지 않을 수 있냐, 남이 따로 없다며 핀잔을 주긴 하지만 이게 현실인걸 어쩌겠는가. 서로에게 딱히 불만도 없고 이런 관계가 불편하지도 않다.
이렇게 남보기엔 남남처럼 보이는 아빠와 나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바로 여행이다.
나의 여행 유전자는 아빠에게서 왔다. 아빠가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넉넉한 유산도 아니고, 따뜻한 사랑과 애정 뭐 그런 오글거리는 것도 아니고 여행하는 삶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주말이면 늘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함께 어디로든 집 밖을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아빠의 성향덕에 우리 가족은 말 그대로 전국 곳곳을 참 많이도 ‘싸돌아다녔다’. 부모님은 부부교사 셨기에 네 식구가 모두 방학을 맞이하면 기차를 타고 강원도 일주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엄마 없이 우리 남매만 데리고 여행을 하며 나에게는 ‘여행 총무’ 역할을 맡겨 어릴 때부터 의도치 않은 실생활 경제교육도 받았았다. 그러기에 아빠와의 추억은 모두 여행과 관련되어 있다.
나의 첫 해외여행 또한 아빠와의 여행이었다.
아빠는 동생이 수능을 마친 그 해 겨울, 네 식구를 데리고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했다. 항공권부터 호텔, 세부 일정까지 모두 자유였다. 우리 네 식구는 왕복항공권, 그리고 첫 여행지인 영국 런던의 게스트하우스만 예약해 둔 채 사전처럼 두꺼운 가이드북 한 권만 들고서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무 살이던 나는 해외여행을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아빠와 함께하는 자유여행이 어떤 것일지 전혀 모른 채, 싸이월드에 감성에 젖은 여행 기대글들을 마구 적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스무 살 감성에 맞는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유럽여행커녕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제목의 지극히 사실적인 가족 다큐였다.
유럽여행 중 가장 내게 괴로움으로 기억되는 건 음식이었다. 아빠는 유럽여행의 20일 동안 단 한 번도 현지 식당을 가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의 식재료로 그곳의 특별함이 담긴 음식을 맛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도, 아빠는 서양음식 느끼해서 못 먹는다며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한국에서도 지겹도록 먹던 맥도날드였다. 맥도날드도 따지고 보면 햄버거에 감자튀김과 치킨너겟 따위의 느끼한 서양 음식 아닌가! 그럼에도 아빠는 그건 한국에서 먹던 거라 잘 넘어간다면서 점심은 맥도날드, 저녁은 중국식 레스토랑 혹은 한식당만을 찾았다. 그렇게 열흘정도 지나자 아빠는 도저히 이렇게 먹고서는 여행이 안 되겠다며 밥을 해 먹어야겠으니 아파트형 콘도를 숙소로 잡자고 했다. 맥도날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여행 와서 제일 좋은 건 음식을 안 해도 된다는 거라고 말하던 엄마는 그날 저녁부터 매일 유럽의 부엌에서 유럽의 식재료로 한국식 음식을 만들어야만 했다.
스무 살. 그때의 나는 스무 살이었다. 겨우 스무 살.
스무 살의 내가 유럽 여행에 기대한 건 광고에서 보던 파리 거리의 야외테라스에서 마시는 따뜻하고 진한 커피 혹은 와인 곁들인 파스타와 피자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 내 기대와 로망은 그 긴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충족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아빠는 그런 걸 싫어하니까. 여행 중 유일하게 먹어본 현지식은 스페인에서의 빠에야였다. 현지식이라면 절레절레하던 아빠가 유일하게 결단한 음식이 쌀로 만들었다는 빠에야였는데, 그게 악수가 될 줄이야. 빠에야 이후로 현지식과는 완전히 담을 쌓아버린 아빠 때문에 이후 우리 여행에서 ‘현지식’은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스무 살의 나는 레스토랑마다 걸어놓은 현지식 메뉴를 아련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또 다른 여행의 고통은 아빠가 잡은 여행 콘셉트가 ‘배낭여행’이었다는 사실이다. 배낭여행자에게 사치와 호사는 꿈도 못 꿀 일. 당연히 택시는 사치와 호사의 상징이므로 우리는 대중교통과 두 다리로만 열심히 다녀야만 했다. 아빠는 고등학교 사회선생님이셨으니 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얼마나 통달을 하고 계셨겠는가. 더군다나 이 여행은 아빠에게도 첫 해외여행이었다! 아빠는 마치 하루하루 관광지 도장 깨기라고 하듯이, 아침에 적어 둔 관광지 리스트를 모두 다 둘러보고 나서야 우리에게 숙소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아빠의 여행지론은 ‘책에서 본 걸 실제로 봤으면 됐다’ 정도였는지, 관광명소에 도착하면 사진 찍고 대충 둘러본 후, “자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을 외쳤다.
에펠탑이 보이는 공원에 앉아 여유롭게 노을을 감상한다던지, 타워브리지의 야경을 보며 산책하는 것, 바르셀로나 람브라스 거리의 예술가들의 음악을 감상하는 것 등은 아빠의 스케줄에는 없었다. 자유여행을 왔지만 가족들에게 자유라고는 1도 허락되지 않는 아버지의 패키지여행.
아침에 나가서 저녁 먹기 전까지 맥도널드로 끼니를 때운 채 쉬지 않고 걸어 다니기만 했으니 나의 첫 유럽 여행은 ‘걷고 사진 찍고 맥도날드를 먹는 시간이었다.’ 쯤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와의 유럽 여행은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백 번 천 번 실감하게 하는 여행이었다. 스마트폰도 번역기도 없던 시절에 영어 한 마디 못하던 중년부부와 두 청년의 여행은 아름답지도 평화롭지도 못한, 말 그대로 ‘유럽 여행에서 살아남기’ 시리즈였다.
비록 아빠는 나에게 첫 해외여행에 대한 기억을 고통과 눈물의 시간으로 만들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작고 소소한 장면 하나하나는 우리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되어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캐리어 한 구석 팩소주를 소중히 담아 매일 하나씩 꺼내 유럽에서 차린 조촐한 한국식 저녁에 반주를 곁들이던 아빠의 모습, 티켓이 비싸다는 이유로 그렇게도 좋아하는 마드리드 축구경기 관람을 결코 허락하지 않자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며칠을 반항하던 동생, 저녁이 되면 숙소 앞 작은 상점에에서 최대한 한국과 비슷한 겉모습을 한 채소를 찾느라 서성이던 엄마. 그리고 낭만과 감성이라곤 1도 없는 여행이었음에도 유럽여행을 떠난 나를 부러워하던 친구들을 실망시켜 줄 수 없기에 쥐어짜 낸 감성으로 싸이월드에 여행 사진을 올리던 나까지.
그때의 사진들은 모두 사라져 몇 장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 넷은 요즘도 가끔 모여 술을 한두 잔 걸친 밤이면 20년 전의 유럽여행을 안주로 삼는다. 같은 경험을 나누었지만 기억은 각자의 몫이기에 아빠는 유럽여행이 너무 좋지 않았냐며 그 시절에 아이들 데리고 유럽여행 떠난 아빠는 나뿐일 거라며 자랑을 일삼는다. 거기다 대고 나는 그건 아빠의 기억 조작이라며 투덜대다가 결국 대화의 마무리는 역시 ‘성인이 된 가족끼리는 여행 가는 거 아니다’로 결론짓곤 한다.
비단 아빠와의 여행뿐이겠는가. 돌이켜보면 분명 여행은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낯선 곳에 발을 내밀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 여행 그 본질에서 오는 기대감과 설렘은 여행에서 돌아온 일상에서 늘 여행을 다시 꿈꾸게 만든다. 그래서 일흔셋의 우리 아빠는 지난주 중국으로 한 달간 여행을 떠났고 나는 다가오는 방학에 아이들과 베트남으로 떠날 것이다. 아빠가 내게 물려준 여행 유전자는 이제 서서히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있겠지. 내 아이들은 엄마와의 여행을 어떤 그림으로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여행의 추억들이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하나씩 꺼내먹는 달콤한 초콜릿 같은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