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악기로만 하는 게 아니야.
아이가 음악에 관심을 보인다.
아이의 친구들이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그럼 우리 아이도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하는데..?
핸드폰을 들어 '00동 피아노', '00동 바이올린'을 검색한다. 제일 좋아 보이는 학원으로 상담예약을 잡았다. 상담 날, 원장님의 교육철학도 좋고 학원 아이들을 보니 우리 아이도 저렇게 금방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너무 설렌다. 당장 카드를 빼서 결제요청을 드린다.
학원에 다닌 지 한 달, 아이가 너무 신나게 다닌다. 선생님도 우리 아이를 칭찬해 주신다. 더 빨리 보내줄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6개월이 지났다. 아이가 연주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아이고 힘들었구나, 공감해 주는 척을 하지만 그래도 뭐든 1년은 무조건 해야 하는 거라며 설득해 다시 아이를 학원에 보낸다.
일 년이 지났다. 이제는 가기 싫다고 한다.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선생님께 상담을 드렸다. 여전히 아이가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하신다.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한다. 빠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악기 실력도 좋아지지 않았다. 돈이 너무 아깝다. 결론을 내렸다.
우리 아이는 음악에 관심과 재능이 없구나. 음악은 여기까지 하자.
음악=악기, 혹시 이런 공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이 글을 끝까지 집중해서 읽어주길 부탁드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악 실력과 악기 실력은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 '악기를 잘하면 음악도 잘한다'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기 실력이 없다고 해서 음악을 못하는 건 절대 아니다.
악기 연주는 쉬운 걸까? 악기를 연주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신체의 기관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나이대별, 신체별로 맞는 악기가 따로 있다. 악기를 잘 연주하려면 '운동능력'도 좋아야 하고 '신체 협응력'도 좋아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이 모두 다르지 않는가.
어떤 아이는 악기 앞에서 자세 잡는 것부터가 힘든 아이도 있고 소근육 발달이 느려 손가락을 민첩하게 못 움직이는 아이도 있다. 또 악보에 나오는 줄, 칸 계산이 힘들어 계이름을 못 보는 아이도 있고 눈으로 본 계이름의 정보를 손으로 전달하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아이도 있다.
악기를 다룬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큰 즐거움이 되고 유익한 활동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악기 연주는 쉽게 할 수 없는 분야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이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어른인 우리가 더 잘 알지 않는가. 요즘 30-40대 학부모님들은 피아노 교육을 받으신 분들이 꽤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 피아노 연주를 하실 수 있는 분은 몇 분이나 될까. 악기 연주가 쉽지 않다는 것. 우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들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해결방법을 찾자.
이번 글에는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미은이'와 '악기 연주가 너무 힘든 파은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미은이의 수업이야기
레슨 시간 전부터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즐기는 아이. 연주곡을 금방 외워 버리는 능력이 있는 아이. 이런 미은이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바로 '악보를 잘 못 읽는다는 것'
연주 실력만 보면 문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곡을 들어가야 하는 시기가 되면 나와 미은이의 사이에는 묘한 신경전이 생긴다.
악보를 보고 바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초견'이라고 하는데 미은이는 이 부분이 많이 부족했다. 악보를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아이,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번 읽은 계이름은 빠르게 외워버리는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악보를 보지 않아도 연주하는 게 가능했다. 아직은 연주곡의 길이가 길지 않아 외우는 것이 쉽게 가능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악보 읽는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미은이가 그토록 원하던 교회 반주를 하려면 초견 연습은 더욱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 계이름은 뭐지?", "악보 보고 연주하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던 학생이다. 미은이도 자신의 실력을 아는 터라 새로운 곡을 배우는 것을 점점 더 거부했고 그래서 몇 달 동안은 연주곡 레퍼토리가 확장되지 못하기도 했다. 본인도 그 부분이 답답했는지 어느 날은 새로운 악보가 주어졌을 때 악보가 아닌 유튜브를 보고 건반의 자리를 외워서 곡을 연습해 온 날도 있었다.
"미은아,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악보도 안 보고 이렇게 연습해 왔어?"라고 묻자 미은이는 당황했다.
"제가 악보 안 본 지 어떻게 아셨어요?"
"뭘 어떻게 알긴. 선생님 되면 다 보여."
미은이 눈에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내가 준 악보와 연주법이 달랐다. 미은이는 다른 버전으로 쓰인 악보의 연주를 보고 연습한 것이었다. 중간중간 반주 패턴과 음이 다르니 바로 알 수밖에. 시간이 지나고 연주곡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미은이는 더 힘들어했다. 악보 보는 능력은 꾸준히 늘었으나 자신의 연주 실력을 뒷받침해줄 만큼은 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답답해하는 상황이었다.
"미은아, 피아노 외에 또 관심 있는 악기는 뭐야?"
"저 바이올린도 해보고 싶었어요."
오! 단선율 악기다. 한번 악기를 바꿔서 음악교육을 이어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어머님과 상담을 통해 미은이는 피아노 레슨 횟수를 줄이고 바이올린 레슨을 새롭게 시작했다.
초반에는 나만 보면 '바이올린 때문에 팔 아파요. 어깨도 아파요. 목도 아파요. 맨날 줄 긋기만 해요.'라며 다른 악기를 권했던 나에게 매번 하소연을 했다. 그래도 '악보는 보기 쉬워요.'라고 말하는 아이. 그래 조금만 더 해보자 미은아.
미은이의 실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 피아노 연주도 잘했던 아이다 보니 연주하는데 필요한 운동능력도 좋았고 신체 협응력도 좋은 아이였다. 이제 악보 보는 것도 편해지니 자신감도 생기고 실력도 나날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미은이는 피아노 시간에도 바이올린을 들고 와 나에게 반주를 시키기도 했다.
악기 연주가 너무 힘든 파은이의 수업이야기
아이가 음악에 관심을 보여서 피아노를 시작한 작은 체구를 가진 아이. 88개의 건반을 가진 커다란 피아노 앞에서 모든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파은이는 유독 더 작아 보이는 아이였다. 피아노 악보에 관심이 많은 파은이는 음표의 이름은 물론 계이름을 보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아이는 손모양과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허리를 세우지 못해서 내 손은 항상 파은이의 허리에 가 있었고 손모양 잡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손모양을 잡으니 이번에는 터치가 문제였다. 손에 힘이 너무 없다 보니 터치가 너무 약했다. 터치가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잠시 기뻤지만 그다음은 테크닉이 발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둔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스케일이 많은 곡을 연주하는 것을 참 어려워했다. 연주를 못한 편은 아니었다.
문제는 콩쿠르이나 연주회처럼 연주를 잘 보여줘야 할 땐 테크닉이 많지 않은 곡을 골라야 하다 보니 곡 선택의 폭이 점점 더 좁아지는 것과 생각보다 콩쿠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 본인이 음악에 관심이 많은 만큼 다른 곡을 연주하고 싶어도 욕심만큼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연주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주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파은이가 자신감 넘치게 잘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음악 이론, 음악 감상평이다. 작곡이나 음악사, 음악감상 수업이 있는 날이면 파은이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심지어 수업을 준비한 나보다 음악사를 더 잘 알고 있을 때도 있었으며, 음악을 감상하고 느낌을 말할 때는 음악 평론가 못지않게 자기 생각을 잘 말하는 친구였다.
참 신기했다. 이렇게 음악을 좋아하다니. 전공을 한 나보다 더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였다. 또 음악 이론은 파은이에게 놀잇감이 되었다. 이론책을 놀이책인 것처럼 재밌게 풀어댔고 알게 된 음악 이론을 악보에서 직접 찾아보며 노는 아이였다. 레슨 때 이음표는 슬러, 붙임줄은 타이라고 음악 원어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일반 친구들에게 슬러, 타이라고 하면 이게 머지? 하며 눈동자에 지진 난다.
파은이를 작곡 선생님께 보냈다. 작곡 선생님께서 아이가 음악도 좋아하고 표현도 잘하며 어려운 음악이론도 너무 이해를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매 수업시간마다 눈빛이 빛나는 아이라며 이런 아이를 만나게 해 줘서 고맙다며 나에게 고마움도 표현하셨다. 우리 파은이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나는 학생 때처럼 음악사를 공부하고 음악 평론서를 엄청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파은이와 대화라도 할 수 있겠지.
현재 미은이는 바이올린이 아닌 첼로를 하고 있다. 그리고 피아노 수업으로는 더 이상 나를 만나지 않는다.
파은이는 다른 음악 활동을 하진 않지만 음악회 티켓을 자신의 용돈으로 살 만큼 음악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나는 이 아이들이 참 고맙다. 방식은 다르지만 음악을 항상 자신들의 곁에 두고 살고 있어서.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아, 음악을 관뒀다면. 아이들 인생에서 음악은 하나의 경험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교육현장에 있으면 미은이와 파은이 같은 아이들을 참 많이 만난다. 그중 음악을 관둔 아이도 있고 다른 악기나 작곡 활동으로 음악 교육의 방향을 바꿔 꾸준히 음악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는 음악교육에 대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특히 악기 실력이 늘지 않으면 음악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음악교육은 악기교육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빨리 바꾸자.
악기 연주는 힘들어 하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고 표현하는 것을 잘하는 파은이 같은 아이들이 있다. 이런 친구는 음악 이론을 좀 더 집중적으로 배워 작곡활동으로 음악교육을 이어나가면 된다. 꼭 악기를 배워야지만 음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영역도 음악교육이 될 수 있고 음악 이론만 배우는 것도 음악교육이 될 수 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미은이처럼 악보를 잘 못 보는 아이들이 있다. 피아노 악보는 단선율, 즉 하나의 선율로만 연주되는 곡이 많이 없다. 그렇다 보니 악보를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손가락 열개를 모두 사용해서 눌러야 되는 화음이 나오면 열개의 음표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악보 보는 실력이 늘지 않아 연주가 어려워지는 케이스도 있다. 하나의 선율은 잘 읽지만 화음이나 다른 성부가 동시에 나오는 악보를 잘 못 보는 경우. 악보를 읽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좋아지겠지만 이 연습을 버틸 아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아이들은 다른 해결방법이 있다. 바로 단선율 악기로 바꿔주는 것. 우리가 흔히 아는 단선율 악기에는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있다. 악보가 한 선율로 나온다고 해서 단선율 악기가 쉬운 건 아니다. 자세나 연주법은 피아노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다성부 악보가 어려워 음악을 그만두려는 아이에게는 한 번쯤 권해보고 싶은 해결방법이다.
피아노가 음악에 전부도 아니고 기초도 아니다. 음악교육을 꼭 악기로 시작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피아노를 못 친다고, 악기를 잘 못 다룬다고 음악을 관두는 행동은 하지 말자. 아이에게 더 잘 맞는 악기, 혹은 더 잘 맞는 음악교육을 선택해서 아이가 음악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자.
잊지 말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 곁에 평생 음악이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라는 것을.
음악은 상처 난 마음에 대한 약이다.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
음악이 있는 곳에는 악이 있을 수 없다.
-세르반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