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방에 갇혀 사측과 싸우는 시간들, 이상한 섬에 갇혀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싸움의 트라우마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불면증에 우울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정신병이 올 것 같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쉬면서 실업급여를 따박따박 몇 개월이나 나라에서 챙겨주니 얼마나 좋은 거냐며 위로해 보려 애썼다. 남들이 보기엔 홍시처럼 겉은 예쁘게 농익어 보였어도, 사실 속은 곪을 대로 곪아버려 툭 건들면 터질 만큼 너무 많이 아팠다. 가난한 주머니 사정은 취향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버렸고, 쿨한 척 웃었지만 사실 좋아하는 지인들조차 만날 용기를 잃게 만든 시간들이었다.
심리치료를 받거나 정신과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진료 기록이 혹시라도 재취업할 때 걸림돌이 될 것 같아 내내 검색만 하다 말았다. 그러다가 미술심리치료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때도 미술 과제를 한다면 9시간씩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도 신이 나 작업에 집중했던 나였다. 물감을 만지며 그림 작업에 몰입 한다면 이 고통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대안책으로 실업자 국비지원 과정으로 컬러리스트(색채전문가) 기사 자격증 과정을 등록했다. 이 와중에도 취미가 아닌 자격증 과정을 등록해야 하는 꼴이 우습지만 먹고 살기 위한 준비도 해야 하니 이게 내겐 최선일 게다.
아침부터 눈을 뜨면 종로타워 뒤편에 있는 허름한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마침 학원 앞에는 맥도날드가 있었다. 매일 아침 ‘행복의 나라’ 메뉴인 천 원짜리 드립 커피를 한잔 사고는 나도 오늘만큼은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웠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학원을 가는 길은 멀었지만 괜찮았다. 집중해서 조색을 하는 내내 선생님은 음악을 틀어주곤 했는데, 그 플레이리스트는 마치 과거는 다 잊고 새로 시작하라고 응원해 주는 치유제를 주시는 것 같았다.
컬러리스트 실기 시험은 12가지 포스터칼라 물감을 이용해 총 7시간 정도 3개의 작업형 과목을 순서대로 해내야 한다. 게다가 4년제 관련 학과를 나와야 치를 수 있는 기사*시험이다 보니 알아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미술 역사와 사조부터 색채 보정을 위한 공학적인 계산, 조색과 배색을 기반으로 마케팅적 요소를 녹여 수립해야 하는 색채계획까지 방대했다.
기사: 국가에서 주관하는 자격시험으로, 관련학과의 대학 졸업자 또는 졸업 예정자이거나 실무 경력 4년 이상 경력 필요
미대를 나온 친구들은 쓱쓱 물감을 섞어 원하는 색으로 잘 만들던데, 나는 감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깔끔하게 제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기에 섬세하게 작업해야 하는 집중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온전히 집중해야만 시간 내에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학원을 다녀오면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었고, 못다 한 과제까지 하고 나면 자정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을 흘려보내며 버텨냈다.
온종일 물감을 만지다 보니 조금씩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친구들도 하나 둘 만나 볼 용기가 생겼다. 이 시기에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홈쇼핑 입사 동기였던 동갑내기 경훈이었다. 여전히 어느 대표가 말했던 대로 퇴사를 후회할 거라는 저주에 걸린 것 마냥 그를 만나러 가기 전날에도, 사실 호주에서도 종종 나는 방송 준비를 하는 꿈을 꾸었다.
퇴사 이후 연락을 한 적도 없고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본 적도 없던 그였지만, 먼 어릴적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너무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거지같이 지내야만 했던 호주에서 보낸 시간들을 하나 둘 입 밖으로 용기 내어 꺼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양한 삶을 살아온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줄 뿐이었다.
그렇게 좌절과 불안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위에 감사함과 용기를 더해 무더운 여름을 잘 보내며 다가오는 9월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를 준비했다. 34살의 신입사원. 정말 십 년째 신입사원 공채에 도전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이번에 다 떨어지면, 더는 미련 없이 내 인생에 회사 생활이란 없다고 다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신입사원 입사지원서에는 어떤 내용을 담아내야 할지, 대학 졸업 후 떠돌며 고민한 삶의 방향성과 호주 생활을 통해 깨달은 인사이트를 정리해 녹였다.
1. 좋아하는 일 보다 잘하는 일을 선택하자.
2. 퇴사를 하고 싶을 때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고 이유를 직접 종이에 써보자. 특히, 사람이 싫은 게 가장 큰 이유라면, 조직을 떠나기보다 부서를 옮겨 환경을 바꿔보는 것을 고려해 보자.
3. 호주는 이미 유통의 경계가 무너졌다. 우체국에서도 깡통 스마트폰을 살 수 있고, 과일가게에서도 유심칩을 판매한다. 심지어 마트나 맥도날드에서도 현금을 물건처럼 구매하여 인출도 가능하다. 산업의 경계가 흐려지는 게 미래라면, 다방면의 산업과 연계하여 무한 확장할 수 있는 통신사 같은 무형의 서비스 업계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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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수백통의 이력서를 여기저기 제출했고, 그 결과 단 한 곳만 서류 통과를 할 수 있었다. 그곳은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3사 통신사 계열사 중 한 곳으로 사업 포트폴리오에 유기농 화장품이 있는 곳이었다. 정말 유난히도 길게 느껴진 3개월의 면접 여정을 보내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철저하게 모든 과정이 블라인드 채용으로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일 게다.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 강원도에 있는 그룹 연수원으로 입소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올해 하반기에 최종합격한 380여 명이나 되는 전체 그룹사의 신입사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특이했던 점은 이번 공채에 학부생뿐만 아니라 석·박사 졸업자도 함께 했고, 그렇게 모든 계열사의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배정된 우리 팀에서 석사들보다 내가 나이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연수가 내 인생에서 마지막 신입사원 연수이길 바랐다. 회사는 기업 스폰서로 5G 평창 동계올림픽에 많은 투자를 했단다. 그 덕에 올림픽 개막식 퍼포먼스에 참여하기 위해 드론 아래 광화문 거리에서 성화봉송 주자로 함께 뛰며, 오히려 제주도에서 그렇게 된 것이 이렇게 풀리려고 한 것은 아닌지 믿지도 않은 신을 찾으며 감사했다. 그렇게 그동안 쭈그러들었던 자존감은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그래, 신이 있다면 내게 마지막 주는 기회일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에 다신 없을, 아니 다신 없어야 한다는 각오로 인생의 마지막 연수를 최고령 사원으로서 한 달간 몸이 부서져라 정말 열심히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