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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육지행

by 공대오빠

그동안 청춘을 갉아 버린 시간 속에 또다시 미래를 고민하고 있을 때, 먼저 한국으로 갔던 기용이가 유럽 여행에 불을 지폈다.


그는 젊을 때만 해볼 수 있는 일이라며 무전여행을 제안했다. 유럽 곳곳을 다니며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현장에서 인화한 것을 팔아 한 달간 여행을 같이 해보자고 했다. 각자 잘하는 것을 나누어 그는 사진을 찍고, 나는 현장에서 사람을 모으거나 사업기획서를 작성해 기업 스폰서를 찾아 받아 비용을 충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해도 자기소개서에 멋지게 풀어낸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희망 회로를 돌렸다. 그렇게 호주에서의 생활은 모두 정리하고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우리는 첫날부터 삐그덕 댔다. 프린터기와 차량에 쓸 법한 대형 배터리, 숙박비용을 줄이기 위한 간이 텐트와 침낭까지 이고 지고 너무 힘에 부쳤다. 인생의 무게도 버거운데 실제 짐도 많으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게다가 우리 둘은 식습관이나 보고 싶은 관광지, 경제적인 여건도 너무 달랐다. 정말 숨 쉬는 것 빼고 모든 것에 맞지가 않았다.


어딜 가든 영업 좀 하려고 하면 보안관에게 쫓겨 사진을 찍어보지도 못했다. 그저 꾸역꾸역 일정에 맞춰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독일을 지나 체코까지 계속해서 이동만 했다. 흐린 날씨에 하루 종일 싸우고 기분이 좋지 않으니, 어쩌면 남들에겐 평생소원이라는 유럽 여행이 감흥도 감동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2주 만에 도착한 프라하는 달랐다. 태어나서 여태껏 본 세상 중 그렇게 아름다운 동화 같은 야경은 처음 본 게다.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미혹되어 결국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경찰서에 가서 CCTV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그들에게는 너무 흔한 일인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쓸모없는 서류만 영어와 체코어로 잔뜩 꾸며주었다. 그렇게 내가 가진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니, 물 한 잔 사 먹는 것조차 기용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즐기지 못하는 이 여행이 지겨웠을 게다. 이렇게 2주 동안 쉼 없이 쌓아 올린 불만은 결국 오스트리아에서 터지고야 말았다. 나도 그렇게 길 한복판에서 누군가에게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 본 건 처음이었다. 결국 갖고 있던 공용짐이 든 캐리어를 집어던지고는 혼자 파리로 와버렸다.


지난 몇 년간 고생의 결과가 빈털터리가 되어 사람도 잃고 혼자가 된 것이 너무 속상했다. 그렇게 아름답다는 에펠탑도 그저 지린내에 둘러싸인 낡은 고철 덩어리일 뿐, 마음은 삐뚤어지다 못해 망가진 것 같았다. 그 예쁜 샹드마르스 공원에 앉아 울고 또 울다 한국으로 이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니 엄마가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계셨다. 1년 반을 매일 같이 그리워했던 엄마의 도마 칼질 소리를 들으니 나는 또 무너져 한참을 펑펑 울었다. 교직원으로 갔다 온 아들의 모습은 기대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을 게다. 눈물 콧물 범벅에 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 삐쩍 말라서는 맨발에 쪼리를 신고 온 거지꼴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냥 조용히 안아 주셨다.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둘러댔다. 그 와중에 염치없이 잠은 어찌나 쏟아지던지, 정말 오랜만에 편하고 깊게 잠이 들었다.



25살 대학 졸업 후 1년 이상 근무해 본 회사 없음.
업종이나 직무의 일관성이 없으며 호주 워홀 1년 반이 마지막.
지금은 32세, 중고 신입을 준비하는 취준생.



아무리 이력서를 넣어도 면접 볼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용기를 내 대학교 취업센터에 다시 문을 두드렸다. 학부 시절부터 나를 쭉 지켜봐 온 선생님은 반갑게 맞이해 주시며, 지금까지 해 온 다양한 경험을 살려 취업 관련 상담 직무를 해보는 것을 추천해 주셨다. 현실적으로 수도권에 있는 대학교 취업센터의 교직원으로 입사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게 전국의 대학교의 채용공고를 뒤졌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 제주도에 있는 국제학교 입학 상담 마케팅팀에 신입사원으로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기회가 얼마나 감사한지, 처음 몇 달은 사원증을 목에 매고 잘 만큼 너무 행복했다. 상담해야 할 내용은 달랐지만, 학생의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학년에 배정하는 일은 업(業)에 대한 결에서 보았을 때는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입학설명회를 통해 사람들 앞에서 학교를 홍보하고 사회를 보는 일도 꽤 재미있고, 잘 해냈다.


외롭게 떨어져 있는 동그란 섬 하나, 제주도는 호주와 많이 닮아 있었다. 여기도 육지에서 온 다양한 청년들이 모여 끈끈한 동료애를 형성하며 잘 적응했고, 먹고살 만했다. 바나나 맛 초코파이 신상이 나와서 먹고 싶다니 먼 길을 나가 구해다 준 진이, 휴지 한 통을 다 쓸 만큼 눈물 콧물 짜며 같이 울어준 이경이, 중고 신입 오빠가 불편하지 않게 제주도의 삶을 즐길 수 있게 세심하게 챙겨준 은재와 도희 등 많은 청춘이 어울려 살았다. 남들은 제주도에 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못 해보는 제주살이라는데, 이제부터라도 경력을 잘 쌓아가고 인생을 즐겨보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팀은 팀장과 나를 제외하고 3명이 더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대리님이자 누나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한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 같았다. 기존 팀원들과 내가 더 친하게 지내자, 그녀는 시시콜콜 말도 안 되는 일로 나를 괴롭혔다. 예를 들어, 입학 서류 확인 서명을 모나미 볼펜이 아닌 플러스 검정 펜을 썼다는 이유로 복도로 불러서 사람들 앞에서 혼을 낸다거나, 점심시간에 본인을 빼고 우리끼리 편의점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전화해서는 어디냐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엑셀 수식은 믿을 수가 없다며 계산기를 들고 하나하나 불필요한 수기 작업을 하며 덩달아 눈치 야근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사무국장은 나와 제일 친하게 지냈던 어린 은재 선배를 방으로 불렀다. 그러면서 우리 둘만 임금 동결을 할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만 총무팀으로 부서 이동을 하란다. 제주도에 있는 국제학교 중 입학팀 업무에 맞게 학생 수도 가장 많이 증원시켰고, 어느 입학시험 하나 빠뜨린 것 없이 업무를 잘하며 대내외 평가도 좋았는데 연봉을 우리 둘만 올려주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커리어 관리 측면에서 직무 이동을 이렇게 마음대로 해버리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번 통보에 관해 정확한 인사 평가 항목은 무엇이었는지, 그 평가지에 내 결과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국장은 사원급이 감히 이사에게 말대꾸한다며 그 자리에서 마음대로 본인 명의로 인사위원회를 단독으로 열었다. 그러더니 3개월의 업무 정지 징계를 내려버렸다. 정말 그날로 드라마처럼 화장실 옆 빈방에 노트북도 없이 책상과 의자 하나만 넣어 주고는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우리 팀 대리가 사적으로 국장과 친한 것을 이용해 나를 괴롭힌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든 항상 성실하고 착하다고 인정받아 온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나를 잘 아는 동료들은 계속 나를 지지했다. 내 독방에 방문하여 간식을 가져다주고 점심을 돌아가며 같이 먹자, 국장과 총무부장은 전체 조회 시간을 이용해 전 직원에게 징계 중인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그날, 내 독방 유리창에 누군가 응원의 포스트잇 한 장을 붙이고 갔다.

-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 neither does one fine day.
Similarly, one day or brief time of happiness does not make a person entirely happy.

— Aristotle

(한 마리의 제비가 여름을 만들지 않듯, 짧은 순간의 행복만으로 사람은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


오늘의 이런 일들에 집착하지 말고, 인생 길게 보고 가라는 희망을 주고 싶은 것일 게다. 억울함을 알리고자 노동부와 인권위원회에 신고했지만, 당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도 없었고 현장 증거가 없는 사적인 영역이라 도와줄 수 없어 죄송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 와중에 국장은 징계위원회 날짜를 마음대로 잡아 통보했다. 그래서 나도 공개적으로 했으면 하는 마음에 녹음기도 준비하고 부끄럼 없이 당당한 마음으로 기재된 징계 사유 하나하나 반박할 내용들을 그동안 업무 성과와 함께 준비해 들어갔다.


컴컴한 회의실에는 대표이사, 국장, 총무부장이 앉았고 맞은편엔 나 혼자 앉아 징계위원회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비공개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사측과 홀로 싸웠다. 이 회의를 쭉 지켜보던 대표이사가 딱 한 마디를 했다.


- 지운 씨, 지금도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하네? 나는 서울에서 대표님께 새벽 2시에 전화가 와도 자다 깨서 무릎 꿇고 전화를 받아.


미국식 선진 교육을 총괄하는 유학파로 제일 공정하고 깨어있는 분일 줄 알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의 혀에서 나온 저 말 같지도 않은 문장이 끝나자, 허공에 보이지 않았던 기대로 가득 찬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 파편으로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더는 이야기 할 필요도 가치도 찾지 못하겠더라. 그리고 이 회의에 있던 총무부장은 밖으로 불러내어 나를 위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 자네, 많이 억울하지? 그런데 말이야. 어떤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15년씩 감옥에 살다 나오는 사람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본인을 위해서 떠나.


3개월 후 징계가 풀려 업무에 복귀한들 이런 사람들과 아래에서 일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측과 개인이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가 없는 게임이더라. 그렇게 나는 다시 1년 만에 퇴사하고는 육지로 올라오기로 했다.


제주도를 떠나는 날 아침, 누군가 내방 문고리에 샌드위치와 간식을 걸어 두었다. 아마 응원을 해주고 싶은 거겠지...


서른네 살의 봄,

그렇게 나는 다시 실업급여를 받은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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