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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다리 잡고 파인

by 공대오빠 Jan 16. 2025

강아지도 만지지 못하는 내가 살아 있는 닭을 잡아 죽이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못하겠다고 하면 이대로 끝이 날 것 같아 무조건 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런데 면접관은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기도하듯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안으며 말을 했다.


- Grandmother! Frankly speaking, I am afraid. I can NOT kill chicken. But I can do everything well except for this. I can do well cleaning, and my hands are very quick. Look at this, I was selected as a member of the best crew in Maccas by managers.

  (할머니!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무서워서 못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다른 건 다 진짜 잘할 수 있어요. 저 청소도 잘하고 손도 진짜 빠르거든요. 이거 보세요, 맥도날드에서 매니저들이 뽑아 이달의 우수 사원도 했어요.)


얼마나 급했으면 순간 면접관을 할머니라고 불렀을까?  그래도 솔직한 모습 덕분에 신체검사 기회를 얻었고, 모두 통과하여 최종적으로 오후/야간 조로 합격할 수 있었다.


닭 공장에서 10분 이내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쉐어하우스를 구했다. 방은 총 3개였고, 한국과 대만에서 온 청년들이 어울려 사는 단독주택이었다. 스탠소프에서는 세탁기가 있는 차고에서 거지같이 살았던 데다 온수도 금방 끊겨 일 끝나고 오면 씻는 게 불편했는데, 여기는 따뜻한 물도 하루종일 잘 나오고 벌레도 없이 쾌적했다.


새 룸메이트는 같은 공장에서 오전 파트로 일하는 한국인 대학생 수민이었다. 농장에서 함께 지냈던 한국인들의 정(情)이 떠올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짐을 풀며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한국인끼리라면 흔히 묻는 나이를 별다른 생각 없이 물었다. 그는 24살이었고 비자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아 한 달 후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 와~ 어리네! 부럽다.


적당히 다음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허공에 던진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 제 나이가 부러운 건, 형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 거예요.


충격이었다. 만난 지 몇 분도 안 된 녀석이 뭘 안다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할까? 저 아이는 대체 무슨 마음의 상처가 있길래 저렇게 뾰족하게 굴까? 아니, 어쩌면 나의 이 낮은 자존감과 처한 상황이 그 짧은 순간에 저 낯선 이에게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한국인은 자고로 밥을 먹어야 친해진다고 했다. 점심도 먹을 겸, 마침 근처에 맥도날드가 있어 그를 데리고 나가 햄버거를 사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딱딱한 태도에 불친절했다.


며칠 후, 잉햄 오리엔테이션 날이 되었다. 시간에 맞춰 출근한 사무실에는 신규 입사자 스무 명 남짓이 긴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필요한 서류를 제출한 뒤, 안전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직원은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안전 규정을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도록 시키기도 했다.


공장 내부는 엄청 시원하고 쾌적했다. 머리 위 레일에는 생닭의 각 부위가 걸려 있어 해당 파트로 신속하게 배달되도록 시스템화되어 있었다. 닭의 신선도가 가장 중요하다 보니, 작업장 온도와 위생 관리는 귀찮을 정도로 철저히 이루어졌다. 매일 새 작업복이 지급되었고 장화는 항상 세척해야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맡은 부서는 닭다리에서 뼈를 발라내는 ‘Thigh(닭 허벅지) 파트’였다. 각자 도마 앞에 일렬로 서면, 레일을 타고 닭다리가 두세 개씩 내 앞으로 흘러왔다. 1분 남짓 되는 동안 주어진 닭다리의 뼈를 손바닥만 한 작은 칼로 빠르게 발라내야 했다. 항상 안전을 위해 철로 된 그물형 장갑을 끼고, 오른쪽에는 칼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도구가 도마와 함께 자리마다 세팅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 매니저가 1:1로 옆에 붙어서 닭다리 손질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면 손에 익어 1분당 더 많은 닭다리 뼈를 발라낼 수 있게 되고, 그만큼 시급도 올라간다고 했다.


그렇게 새로운 공장생활에 적응하며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토요일 오후, 하우스메이트 유경이가 또띠아에 피자를 구워준다고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는 라면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간단히 오븐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모습이 그저 신기했다.


이번 주도 우리 고생했다며 콜라를 한 잔 들고 건배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귀신 같은 행색의 노인이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퉁퉁퉁-!


무슨 일인지 들어보니, 집에 형광등이 깜박거려 눈이 아파 못 견디겠으니 와서 교체해 달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마치 지저분하다 못해 '세상에 이런 일이 쓰레기집 편'에 나올 법한 노인의 행색이었다. 옆에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심한 냄새가 났다. 더 가까이에서 보니, 한쪽 눈은 백내장인지 하얗게 변해 검은 눈동자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집은 우리 집 맞은편에서 왼쪽으로 서너 채 떨어진 꽤 가까운 위치였다. 들어가 보니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찌든 화장실 냄새가 났고, 그 옆에서는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개소리에 겁이 났다. 해질녘 아름다웠던 일상이 공포로 뒤덮인 순간이었다.


- 유경아! 너는 밖에 있어. 대신 만약에 무슨 일이 벌어져 내가 소리를 지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뛰어가서 경찰에 신고해 줘.


할아버지는 나를 주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의자를 꺼내 주며 밟고 올라가라고 했다. 형광등 두 개 중 하나가 깜빡이고 있어서 손을 뻗어 그 깜빡이는 전구를 뺐다. 그러자 멀쩡하던 전구까지 같이 불이 나가버렸다.


할아버지는 다른 연장을 가져오더니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 That lightbulb's been there for 15  years, ever since my son replaced it. Now you've gone and touched it, and it’s completely busted!

  (전구는 15년 동안 내 아들이 갈아 끼운 이후 괜찮았었어. 그런데 네가 건드려서 완전히 고장 나버렸잖아!)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내일 부동산에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뒤, 냅다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그 후로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호주는 비자법상 같은 사업주 밑에서 6개월 이상 계속 일을 할 수가 없다. 즉, 공장은 주 단위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한국인이 꽤 많았다. 그래서 적응하는 게 쉬웠던 게다. 특히 거기엔 현욱이의 공이 컸다.


미친 친화력과 여행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에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 함께 일하는 워커들 중에 나이가 가장 어렸음에도 제일 먼저 자동차를 구매해서는 장을 보러 갈 때나 출퇴근을 할 할 때 늘 먼저 나서서 도와주었다.


한 달 후, 현욱이의 생일을 핑계로 친해진 잉햄 사람들과 근교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을 계기로 동갑내기 혜정이, 든든한 동생 지환이와 기용이, 그리고 귀여운 막내 다온이까지, 우리는 함께 모여 살게 될 정도로 또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쯤 현욱에게 난처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갑자기 교통국에서 고지서 한장을 받게된 것이다. 차를 처음 인수받은 날, 아직 표지판을 보는 게 서투른 탓에 모르고 시속 60km/h 단속 구간에서 과속을 한 모양이다. 벌금 무려 531 달러에 벌점이 6점이나 됐다.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놀란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우리는 벌금을 발행한 교통국 사무소로 향했다. 그곳은 운전면허 공증이나 갱신 업무도 처리하는 곳이라 사람이 무척 많았다. 긴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직원을 만날 수 있었고, 긴장한 현욱 대신 내가 나섰다.


- I think this paper show that day my friend bought a car. This time was night and he is a first time drive in here. This fine is very expensive. Could you discount for him?

  (이거 차를 구매한 당일 과속이 찍힌 거 같아요. 시간이 야간인 데다가, 호주에서 하는 첫 운전이라 잘 몰랐어요. 벌금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좀 깎아 줄 수 있나요?)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무섭게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I’ve never heard anyone asking for a fine reduction in all my time working here. That’s not how things are handled here. Pay the full fine!

  (제가 일하면서 벌금을 깎아달라는 요청은 처음 들어봅니다. 여기는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벌금 완납하고 가세요!)


그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국에서는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면 가끔은 조금 유연하게 처리해주는 경우가 있었기에 이곳에서도 비슷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무언가 도와주고 싶은 급한 마음에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규칙은 곧 규칙이었다. 예외도 없고, 설명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현욱은 그 자리에서 벌금을 완납해야 했다. 기가 죽은 그를 달래기 위해 저녁을 사주었다. 사실 나도 벌금을 내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부끄러움을 지불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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