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어느새 무더운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딸기 농장도 변화하는 계절에 맞춰 잡초를 뽑는 대신 어느 정도 자란 모종을 상품화하는 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시급제‘로 주던 급여를 모종을 다듬어 묶어 내는 만큼 돈을 주는 ‘능력제‘로 변경해 버렸다. 같은 시간 동안 일을 하더라도 생산량에 따라 워커들 간 하루 수입은 천차만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서로 더 많은 흙과 모종을 가져가서 작업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농장주는 매일 새벽이면 트럭을 몰고 가 딸기 모종의 뿌리조차 다치지 않게 밭의 흙을 통째로 퍼왔다. 그러고는 업무가 시작하면 작업자들 테이블 위로 돌아다니는 드럼통에 나누어 담아주었다. 우리들은 배정받은 위치에서 서서 자기 머리 위로 돌아다니는 드럼통이 본인 테이블 위에 오면, 그 순간 통 아랫부분 손잡이를 잡아 쳐야 했다. 그러면 아래쪽 뚜껑이 열리면서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리는 흙과 모종을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빠르게 흙을 털어 내고 깔끔하게 다듬어 뿌리를 20개씩 고무줄로 묶은 후, 자기 번호가 달린 바구니에 담아내면 매니저들이 돌아다니며 검수를 해주었다.
드럼통이 앞쪽에서부터 순서대로 오다 보니 출발하는 입구 쪽에 있는 작업자들이 가장 많은 흙과 모종을 가져갈 수 있었고, 뒤쪽 작업대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회가 줄어든 만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들이 형평성을 위해 아무나 통을 칠 수 없도록 중간중간 통제를 하기도 했는데, 입구에서 제일 멀리 있던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통을 열다 걸리고 말았다.
뉴질랜드에서 매년 이 일을 하러 이맘쯤 온다는 새매니저는 내게 와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괜한 억울함에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고 물어 따졌다. 그러자 그녀는 나보고 20분 동안 밖에 나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씩씩대며 밖에 나와 보니 나처럼 쫓겨난 성격 급한 한국인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순간 치밀었던 화가 그렇게 하늘도 보고 좀 쉬고 나니 누그러졌다.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고 대들었던 매니저에게 미안해지더라. 그래서 다음날 초콜릿을 건네며 어제 일을 사과 드렸다.
그 상황을 모두 지켜 본 데비는 틈만 나면 내 자리에 와서 모종 다듬는 걸 도와 남들 몰래 내 바구니에 더 넣어 주고 가기도 했고, 뉴질랜드 매니저도 종종 와서 내가 한 작업물을 검수할 때면 기준을 낮춰 많이 봐주었다. 역시 세계 어디든 직장에서 일하는 건 비슷한 것 같다.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서로를 이해하면 일이 쉬워진다. 무엇보다 상사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이렇게 농장 일도 잘 적응하고 있는데, 언어 때문에 맥도날드 일을 제대로 못 해보고 잘리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아시아인 크루는 본 적이 없다며 비웃던 몇몇 농장 동료들에게도 보란 듯이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음 주도 맥도날드 로스터(근무 배정표)는 하루밖에 받지 못했지만, 농장 일이 끝나면 매일 한 시간을 걸어 매장을 다시 찾아갔다. 매니저인 마이크가 왜 왔냐고 물으면, 메뉴 공부를 하러 왔다고 웃으며 답했다. 틈이 나 보이는 동료들 옆에 가서는 인사를 하고 이 메뉴는 어떻게 읽는 거냐고 가르쳐 달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지점장인 켈리에게 직접 찾아가 당당히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행동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합격 메일을 주었던 인사담당자가 생각 나 그에게 메일을 보내면 켈리에게 그 내용들이 잘 전달되길 바랐다. 그렇게 며칠을 네이버 사전을 찾아가며 장문의 영어 메일을 썼다.
Good morning! This is Billy(YUN, Ji Woon).
First of all, Thank you for giving a chance to work at your store with good coworkers and managers. I am in chrge of crew at stahnthorpe mcdonald's. Usually I work as Mcdrive cahier and wash up for closing. I submmited my resignation to company in Korea and I decided to go to Australia. Because I would like to study English language and to accumulate various experiences such as marketing, distribution, customer satisfaction and so on. I believe that Mcdonald's correespond with these things. So, I am very happy now.
As you know, I have a working holiday viza. Its avaliable period is one yaer. [...]
I like here, stanthorpe. If possible, I would like to stay here more. It means.. I have to find a job. Could you give me a goodwill? I am usually assigned the roster(the tasks) only once a week, onday per week, 3 or 4 Hours. It makes me a poor living. So, If it is possible, I would like to more work. If I am short on work performance, could you tell me? I will try to improve better my work. [...]
안녕하세요! 저는 빌리(윤지운)입니다.
우선, 좋은 동료들과 매니저들과 함께 매장에서 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스탠소프 맥도날드에서 크루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로 맥드라이브 캐셔와 마감 청소 업무를 맡고 있는데요.
저는 한국에서 근무하던 회사를 퇴사하고 호주로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어를 공부하고 마케팅, 유통, 고객 만족 등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맥도날드가 이러한 목표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스탠소프를 좋아합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더 머물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현재 저는 일주일에 한 번, 하루 3~4시간 정도의 근무 배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생활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더 많은 근무를 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업무 성과가 부족하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더 나은 업무를 위해 개선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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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곧 매니저에게 내용을 잘 확인했다는 답장을 받았고, 그다음 주부터 다시 스케줄을 할당받아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켈리는 나를 보자마자 ‘어셥’부터 하라고 했다. 어셥? 뭐라는 거지;; 애써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자 내 손을 잡고 주방 한쪽의 세척 공간으로 데려가 설거지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내가 아는 설거지는 'wash the dishes'인데 역시 글로 배운 건 현실과 정말 다른 것 같다.
설거지를 하다가 ‘삑-‘ 하고 헤드셋으로 차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들리면, 드라이브스루 부스로 가서 주문을 받아 POS에 입력하고 계산도 해줘야 한다. 그러고는 바로 돌아와 다시 마감 청소 겸 설거지를 했다. 독한 세제를 계속 만져야 하니 장갑을 끼고 해야 하는데, 고객의 계산을 돕는 과정에서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계속 주방과 부스를 뛰어다니다 젖은 장갑을 벗고 다시 끼는 그 시간조차 아깝고 번잡스러워 그냥 맨손으로 했다. 이미 낮에 모종을 다듬느라 쓰는 피부가 약해져 있는데 저녁엔 물과 강한 세제를 계속 다루는 탓에 툭하면 손가락이 쉽게 찢어지고 피가 났다. 그 와중에 매니저가 이걸 보면 집에 가라고 할 까봐 방수 밴드를 몰래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열심히 했다.
하지만 몸이 노력한다고 해서 귀가 저절로 트이진 않았다. 계속해서 언어 문제로 매니저를 부르는 일은 줄지가 않더라. 그 무렵,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앞두고 신메뉴가 쏟아져 나왔다. 한 번도 발음해 본 적 없는 아르헨티나 버거, 영국 파이, 이탈리아 맥플러리 등 세계 각국의 이름이 붙은 메뉴들은 낯설고 어려웠다. 게다가 고객들은 신메뉴가 궁금한 지 내용물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하고, 새로운 야채나 소스는 빼거나 더 넣어 달라고 했다.
대신 눈치껏 누가 시키지도 않은 다른 업무들을 더 챙기려 노력했다. 다른 동료가 마감하며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문을 열어 잡아 주거나, 모두가 퇴근할 때 아침 근무조를 위해 메뉴판을 미리 맥모닝으로 바꾸어 놓는 업무 같은 걸 했다. 그런 모습에 동료들도 내가 좋아졌는지 내가 못 알아 들어도 시간만 나면 수다를 걸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던 것이 주 4회 이상 늘어났고 점점 매니저를 부르는 횟수도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자괴감이 밀려왔다. 매장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 때문에 흐름이 끊기고 삐걱거리는 것 같아 미안했다. 게다가 매장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매니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마인드를 바꿔야 했다. 이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나는 외국인지 않은가? 그리고 아나운서 준비도 했으니 여기 호주에서 만큼은 그 누구보다 한국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일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객 차량이 들어올 때 울리는 ‘삑-‘ 소리는 살아있는 토익 스피킹 시험 같았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싼 영어 말하기 시험을 돈을 받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습이라고 재해석했다.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크가 CCTV를 통해 어두운 밤에 고속도로 위를 혼자 걸어서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내게 위험하게 무슨 짓이냐며 크게 화를 냈다. 그래, 이 정도면 이제는 잘려도 더는 할 말이 없다. 그 생각으로 조용히 마감 청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