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없긴 했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 고속도로 위를 걸어 출퇴근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래도 꿈이 있어 가능했던 게다. 이십 대에 그렇게 많이 읽었던 자기계발서에는 하나같이 R=VD*라고 했다. 달빛이 비쳐주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 앞에서 작가로서 강연하는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 엉터리 마법의 주문을 믿고는 한 시간 내내 허공에 혼잣말을 던져 공포를 깨며 걷고 또 걸었다.
*R=VD: 'Realization = Vivid Dream'의 약자로,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개념
그사이 마이크는 내가 위험한 출퇴근을 하고 있다는 걸 매니저들끼리 공유한 모양이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퇴근 시간이 되자 그날 마감을 맡은 매니저가 자신의 차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매니저들은 돌아가며 나의 퇴근길을 챙겼다. 심지어 베니(Benny) 아저씨는 나와 같은 날짜에 근무를 짜달라고 하더니, 아무 조건 없이 출퇴근을 함께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베니가 물었다.
- How long does a flight take to Korea?
(한국은 여기서 비행기로 얼마나 걸려?)
- Direct flight? It takes about 9 to 10 hours, almost 9,000 km??!
(직항으로 한 9-10시간은 걸리는 것 같아. 거의 9,000km쯤?!
- That’s like going to the moon! What made you come such a long way?
(마치 달나라 같아. 그렇게 먼 길을 왜 온 거야?
나만 아는 이야기, 어디서부터 꺼내어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야간으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이유와 내 예쁜 청춘을 바꾼 그 많은 돈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냥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차창 밖에 비친 달은 참 밝고 둥글었다. 가을 밤공기는 더 차가웠고, 그래서 더 슬펐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더 아끼기 위해 가라지(Garage)*에서 지냈었다. 가라지에는 세탁기와 싱글 침대 2대, 그리고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룸페이트 일본인 요시(よし)가 있었다.
*garage: 주택 한편에 있는 창고 같은 자동차를 주차하는 실내 차고
그날 저녁 불을 끄고 누워 요시에게 답답한 마음에 밤새 속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한국말로 했기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비밀을 품은 외로움과 하루하루 싸우며 버티고 있었다.
몇 주 후, 그날도 어김없이 낮엔 농장을 오후엔 맥도날드로 출근을 했다.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마이크가 환하게 웃는다. 매일 무서운 표정만 짓더니 왜 저럴까? 싶었는데 갑자기 축하한다며 선물을 잔뜩 주고는 우수사원 배지가 달린 모자를 씌워 주었다. 내가 이달의 우수사원으로 뽑혔다고 했다. 매장 한켠에는 내 사진이 걸렸다. 정말 꿈만 같았다.
호주에 온 지 어느새 반년이 흘렀다. 한국은 무더운 여름이겠지만, 여기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법상 같은 사업주 아래에서 6개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딸기 농장도 날이 추워지자 문을 닫았고, 그나마 소개로 찾아간 다른 농장은 겨울비를 맞아도 일을 시켜 도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 둘 동네에 살던 외국인들은 따뜻한 다른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있었다.
닭장처럼 비좁고 추운 집이었지만, 같은 농장에서 함께 일했던 만큼 서로의 고생을 잘 알기에 더 이해하고 의지하며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안방 커플인 소영이는 집세를 깎아주었고, 먹을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옆방에 살던 준성이는 미용 실력을 발휘해 머리를 잘라주고, 새치를 가릴 수 있게 주기적으로 염색도 해주었다. 또 그 옆방에 살던 제빵왕 경아는 손이 정말 빠른 요리 천재였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최소한의 재료로도 뚝딱 맛있는 걸 만들어 주었고, 나를 친동생처럼 잘 따랐다. 룸메이트 요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투덜대면 그냥 끄덕이며 다 들어주었다. 그들 덕분에 심리적인 안정도 찾으며 버틸 수 있었던 시골 생활이었지만, 결국 우리도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다.
다음 일을 구하기 위해 어디로 이동하면 좋을지, 어떤 작물이 다루기 편한 지 수다를 떨다가 브리즈번 시내에 있는 잉햄*이라는 닭공장을 알게 됐다. 급여와 복지 수준이 우리나라로 치면 삼성 같은 대기업만큼 좋다고 소문이 난 곳이란다. 하지만 영어도 잘해야 하고 전화 인터뷰에 대면 면접, 신체검사까지 해야 할 만큼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잉햄: 잉햄스(Inghams)가 운영하는 대표적인 닭고기 가공 시설로, 국내 및 국제 시장에 신선한 닭고기 제품을 공급하는 공장. 특히 맥도날드와 KFC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에도 납품하여, 깨끗한 시설과 높은 급여로 꿈의 생산직 회사 중 하나
주∙야간으로 지금처럼 투잡을 하는 것보다 더 경제적으로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다음 코스는 잉햄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바로 그날 저녁, 검색해 보고는 이력서를 바로 제출했다. 한국에 돌아가려면 시간이 반년은 남았지만, 아직까지 돈을 하나도 모으지도 못했고 많이 지쳤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잉햄에서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며 전화 인터뷰 일정을 안내받았다. 그날은 농장일도 아프다고 빠지고는 인터넷에 떠도는 족보를 달달 외운 후, 출근한 룸메이트들이 모두 나간 조용해진 집에 혼자 남아 최선을 다해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막상 음성으로만 의사소통을 하니 부족한 영어가 또 문제였다. 여권 만료일을 물어보는 'expire'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한참을 헤맸다. 어느 블로그의 후기를 찾아보니, 이 첫 통화에서 반드시 다음 대면 인터뷰 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못하면 탈락이라고 했다. 그런데 면접관은 그냥 반가웠다며 마무리 인사를 하고는 끊으려 한다.
- Please, wait for me! I would like to say, I was selected best crew member of the month by Maccas managers last month! I am very diligent!
(잠깐만! 저 할 말 있어요! 여기 맥도날드에서 지난달 우수사원으로 뽑혔어요! 저 정말 성실해요!)
이 말에 그녀는 웃더니, 그러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니 2주 후 정식 인터뷰를 위해 공장 사무실로 올 수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가 제일 먼저 농장을 떠나게 되었다. 나머지 동료들은 빨리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양파 농장으로 이주를 하겠다고 했다. 대면 인터뷰와 신체검사까지 남은 상태에서 무작정 떠나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 고민했지만, 한 번 더 나의 운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같은 집에 살았던 우리들은 서로를 응원하며 각자의 다음 길을 찾아 떠났다.
공장 근처에 임시 숙소를 찾아 머물다가 인터뷰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공장으로 갔다. 시내에 이렇게 큰 공장이 있다는 게 두 눈으로 보아도 믿기지 않았다. 아침 7시였지만, 이미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입구 앞에는 커다란 트럭에 하얀 닭 수천 마리가 갇혀 울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빨간 것 같은데;; 새치를 가리려 염색한 것이었는데 막 떠오르는 아침 붉은 햇살에 닿으니 더 붉게 보였다. 그래도 외국인데 촌스럽게 이런 거 가지고 행여 불량한 사람이라 생각할까? 싶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혹시 모르니 단정하게 보이고 싶어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모두 채웠다.
안내를 따라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어떤 할머니 면접관이 인사를 하며 나왔다. 소문에는 말이 엄청 빠르고 깐깐한 뉴질랜드 출신의 젊은 여자가 들어올 거라고 했다. 꽤 불친절한 데다 뉴질랜드식 영어 발음이 어려울 것이라 했는데, 내가 만난 면접관은 할머니 특유의 발음이 어려울 뿐 차분히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배려해주었다. 인터뷰가 끝 날 무렵 그녀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 Actually, we need someone in the chicken slaughter section. Do you think you can handle working there? We’re looking for a strong guy because the chickens can get wild and fly around. You’ll need to catch them.
(사실, 닭을 죽이는 파트에 사람이 필요해. 거기에 배치하면 일을 할 수 있겠어? 우리는 강한 남자가 필요해. 닭이 막살아서 날아다니는데 그걸 잡아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