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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벌로마(施罰勞馬)

by 공대오빠

날은 덥고 잡초 뽑는 일에 속도가 나지 않자, 딸기 농장주이자 데비의 상사인 테리(Terry)가 매일 같이 농장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우리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데비와 나는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구는 그를 파리에 비유하여 gadfly*라고 불렀다.



Gadfly: 성가시게 구는 사람, 가축을 물거나 귀찮게 하는 파리의 일종



- Terry is gadfly kkk. OMG! He is coming!

(테리는 똥파리야ㅋㅋㅋ 오마이갓! 그가 온다!)


오늘은 비가 왔다. 게다가 테리의 아들까지 와서는 한국인들은 손이 느리다며 달달 볶았다. 세상 어디를 가든 직장 상사라는 존재는 참 성가신 존재인가 보다. 그렇게 몇 주를 괴롭히더니 함께 일하던 한국인들 대거 해고했다. 그러더니 독일, 프랑스, 대만 등 해외 각지에서 온 워킹홀리데이 워커들로 팀을 다시 꾸렸다.


데비는 이 많은 사람들을 혼자 데리고 일하기가 부담스러웠는지 갑자기 나를 임시 부매니저로 임명했다. 다음 주 월요일 오후 4시까지는 맥도날드 오리엔테이션을 가야 하는데, 어설프게 쉰다고 했다가는 나도 잘릴 분위기였다. 조퇴를 위한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했다.


한국은 지금 연말정산 시즌이다. 부모님을 원격으로 도와드려야 하니, 월요일은 오전만 하고 집에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한국인이 눈치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 형, 거짓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농장 근로계약서에 다른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이 있을 거라며 겸업은 안 된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데비와 테리는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해 자연스레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응원은 해주지 못할 망정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그 와중에 대만에서 온 얘는 내가 업무 지적을 할 때마다 문법이나 맞게 쓰라며 be 동사가 틀렸다는 등 태클을 걸었다. 그녀에게는 내가 성가신 상사였을 게다. 여튼 날도 더운데 다들 도와주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됐어, 그냥 내가 빨리 하고 말지!


잡초를 뽑아 트레이에 던졌는데 순간 바람이 불며 오른쪽 눈에 흙이 들어갔다. 어찌나 아픈지 베드머신(Bed Machine)*에서 내려 생수를 눈에 부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데비가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기 위에 본인의 차량에 태웠다.



베드 머신(Bed Machine): 농작업자가 엎드려서 편하게 잡초를 뽑을 수 있게 도와주는 농기계



그때 저 멀리서 개들이 왔다 갔다 하며 엄청나게 짖어 댔다. 1m는 넘는 커다란 검은 독사가 나타난 것이다. 데비는 뱀에 관심이 많아 늘 뱀에 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기에 그녀는 그 장면을 보고 너무 신이 났다. 나는 그녀의 차 옆에 방치된 채, 카메라를 들고 뱀 근처로 뛰어가더니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이러다 시력을 잃게 되는 건 아닌지 마음은 점점 공포로 변해갔고, 잠시 후 다른 농장의 매니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새로운 안약과 우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걸로 눈을 헹구라는데 아니 아무리 안약 용량이 작아도 그렇지 우유는 좀 아니지 않나? 아 모르겠고, 누군가 눈을 세게 불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Debbie! Help me. Wind 후후 in my eyes!

(데비! 도와줘. 눈에 바람 후후 불어줘)


데비에게 눈에 바람을 세게 불어달라고 후후 부는 시늉을 하며 눈을 크게 뒤집어 깠다. 데비는 무슨 말이냐며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도 문화 차이인가? 그녀는 끝내 불어주지 않았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물질은 없어 보인다며 이미 모래는 빠졌는데 눈에 기스가 나서 아픈 거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시간이 약이라는 듯 붕대로 눈을 감싸주었다. 그리고는 30분만 더 차에 누워 쉬어 보라고 했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외국에서 병원에 가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는 것은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시력을 잃는 것 보단 낫겠다고 생각해 내가 병원비를 다 낼 테니 빨리 응급실에 가자고 했다. 그제서야 데비는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고 병원 예약을 해주었다.


멀찍이 서 있던 민석이가 오더니 내 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내 오른쪽 눈 안에 뭔가 검은 이물질이 있는 거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응급실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비싼 노동을 하게 될 줄이야… 동료 중 영어를 가장 잘하는 동훈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 둘은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은 생각했던 것과 꽤 달랐다. 어느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 과학실 같은 느낌이었다. 차가움보다는 평온함과 느긋함이 깔려 있는 어느 침대에 누웠고, 동훈이는 나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며 병원 관계자들과 소통해 진료를 도왔다. 시력 검사 후, 간호사는 마취약을 눈에 넣더니 식염수를 계속 흘려 부었다.


그 와중에 꼬르륵거리는 덩치 큰 간호사의 배고파하는 소리에 놀랐지만, 이내 웃음이 났다. 몇 시간 동안 시력을 잃을 것 같은 공포에 떨다 병원에 왔다는 안도감에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파하니, 드디어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와서는 눈을 뒤집더니 면봉으로 작은 검은색 모래알을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쉽게 꺼냈다. 그러고는 눈알에 상처가 났는지 세밀하게 다시 기계로 관찰하더니 괜찮다며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오후가 되자 마취가 풀리면서 눈이 조금 시리긴 했지만, 훨씬 편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날 병원비는 농장주(Terry)가 모두 내주었고, 병원에 가느라 일하지 못한 시간도 모두 한 것으로 챙겨주었다. 그동안 테리를 gadfly라고 부르며 욕했던 게 미안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하루 종일 비가 올 거란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맥도날드에 첫 출근하는 오늘은 하루 종일 쨍쨍했다. 시간에 맞춰 매장에 가 보니, 나 포함 3명이 최종 선발되어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러 왔다. 무슨 말인지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부점장의 속사포 랩 수준의 설명이 45분만에 끝났고, 유니폼을 신청한 뒤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 주, 정식으로 로스터*를 받아 첫출근을 하게 되었다.



Roster: 매니저가 매주 작성하는 차주 직원들의 근무표



주방에서 햄버거를 만들거나 감자를 튀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처음부터 드라이브 스루에서 주문을 받으라고 했다. 미안한데, 지금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는데 어떻게 주문을 받겠냐며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점장 켈리는 화가 났는지 지금 뭐하는 거냐며, 배테랑 알바생을 붙여줄 테니 잘 배우면 할 수 있다면서 마이크 헤드셋을 씌워주고는 유니폼에 뱃지가 많은 빨간머리 선배와 함께 부스에 우리 둘을 밀어 었다.


숨이 막혔다. 고속도로에 있는 매장이라 ‘삑-‘ 하고 알람 소리와 함께 차는 줄 서서 들어왔고, 고객은 아임 쏘리만 연발하는 나를 위해 천천히 말을했지만 더욱 긴장한 탓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POS(주문을 받아 입력하는 기계)는 모두 그림으로 되어 있어 사용법은 간단했다. 게다가 농장에서 매주 얼음물 값을 걷으며 동전을 많이 다뤄본 덕에 계산하는 것은 쉬웠다.


문제는 언어였다. 환타조차 생소한 발음에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에게 펩시와 코카콜라는 다른 음료였다. 사이다도 스프라이트와 세븐업으로 꼭 구분해서 사용하고, 핫초코를 핫퍼지라고 불렀다. 긴장한 나머지 음료를 물어보는 것조차 어려워서, 사수의 얼굴만 쳐다보며 손으로 뻐끔뻐끔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 How? say drink?

(어떻게? 음료수 뭐 먹을지 물어봐요?)


그녀는 시크한 표정으로 "What would you like?"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렇게 몇 번 시범을 보여주고는 주방으로 가버렸고, 혼자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몇 번 세트, 무슨 세트가 아니라 버거도 왜 이렇게 요구사항이 많은지, 꼭 이것저것 바꾸어 먹는지 주문 입력은커녕 알아듣기조차 어려웠다. 주문 열 번 중 아홉 번은 알아듣지 못했고, 계속해서 헤드셋 마이크로 매니저를 불러댔다.


- Manager! Help me, I CAN NOT understand;;

(매니저! 도와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바쁜 저녁 피크타임과 마감 시간에 제대로 내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계속 매니저를 불러대니 점점 짜증이 났을게다. 신발도 매뉴얼 상 안전화를 신으라고 분명히 교육을 해줬는데 왜 끈이 달린 운동화를 신고 왔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더니 그다음 주 로스터에는 단 하루(3시긴 짜리) 근무만 배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아예 근무 시간이 0이었다. 사실상 통보 없는 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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