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호주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오늘은 내 생일이자 호주의 국경일인 Australia Day 이다. 아침부터 밀려오는 외로움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혼자 보내고 이어 서른 살 생일까지 혼자라는 현실이 그저 서글펐다.
지구 반대편에서 폭염과 싸우고,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면서 반토막 나버린 체력으로 힘든 날들이지만 오늘만큼은 잠시 잊고 싶다. 끝없이 펼쳐진 밭을 하루종일 기어다니며 잡초를 뽑다가도 허리가 굽어 버릴 것 같으면 가끔 하늘을 잠시 올려다 본다. 그림같은 하얀 뭉게구름은 파아란 하늘에 손에 닿을 것처럼 늘 가까이 떠있다. 그걸 잡아보려 허우적 대면서도 이런 정관을 또 언제 볼 수 있겠냐며, 청춘이란 이름으로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을 감사히 여기며 하루하루 버텨 내고 있었다. 여하튼 오늘만큼은 나를 위해 특별한 날을 만들어 보리라 다짐했다.
퇴근하자마자 늘 지나치기만 했던 대형 마트 내 통닭구이 가게로 뛰어갔다. 매대가 텅텅 빈 걸 보니 오늘도 모두 다 팔리고 없는 모양이다. 직원은 등을 돌리고 열심히 물걸레질하며 마감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대뜸 큰 소리로 말했다.
- Excuse me, today is my birthday! I want to buy a chicken.
(저기요, 오늘 내 생일인데! 치킨을 사고 싶어요.)
직원이 청소를 멈추고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구석에서 은박지로 감싼 따뜻한 치킨 한마리를 꺼내왔다. 그러면서 이 닭 속에 너가 싫어할 수도 있는 향이 진한 쌀(rice)이 들어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계탕 맛이 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는 상관 없다며 오히려 좋다고 냉큼 달라고 했다. 그녀는 기다리라고 하더니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reduce*라는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reduce: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재고를 빨리 소진하기 위해 붙이는 할인 스티커
치킨을 샀는데 맥주가 빠질 수 없지! 집에 오는 길에 그동안 궁금했던 bottle shop에도 들렀다. 호주에서는 일반 마트에서 술을 팔지 못하고, 주류 전용 매장에서 신분을 확인해야만 구매가 가능하다. 팔에 문신이 가득한 점원에게 다가가 여행 책을 펼쳐 VB맥주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 VB Beer is very famous here, right?
(VB 맥주가 가장 여기서 유명하다던데, 맞죠?)
직원은 웃으며 6병짜리 1pack(세트)를 보여줬고, 이걸 사면 2달러를 추가로 할인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이왕 큰 맘 먹고 사는 거니까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어, 이게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아이스박스에서 XXXX 맥주 한 병을 꺼내 주었다. 여기 퀸즐랜드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는 이거라며 꼭 한 번 마셔보라고 했다.
공짜로 준다는 건가? 서비스냐고 물었지만 그는 공짜를 의미한 나의 '서비스' 라는 단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몇 번의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야 무료로 주는 선물임을 알았고, 땡큐! 땡큐!를 외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한국 예능을 보며 치킨과 맥주로 서른 살 생일을 자축했다. (아휴, 근데 진짜 이상한 향 때문에 더는 못먹겠...)
다 먹고 누워서 습관적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그런데 읽지 않은 메일이 한 통이 와있던 게다.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지원했던 맥도날드 Stanthorpe 지점에서 보낸 서류 합격 통보 메일이었다. 본문에는 서류 통과를 축하한다며, 하단에 있는 링크를 클릭해서 인터뷰 일정을 잡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클릭해도 오류 메시지만 반복헤서 떴다.
There are currently no interview slots available. Please, check back later.
(지금은 신청 가능한 면접 일정이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확인해주세요.)
다음날 답답한 마음에 농장 일이 끝나자마자 맥도날드로 향했다. 첫인상이 중요할 것 같아 깔끔하게 보이려고 셔츠와 구두를 꺼내어 입었다. 워홀을 오면서 정장을 싸 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또 이렇게라도 써먹을 수 있다니 웃음이 났다. 고속도로에 있는 매장이라 그런 건지, 평일 저녁이라 그런 건지 생각보다 한산한 느낌이다. 카운터에 가서 매니저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잠시 후, 덩치가 큰 호주 남자 매니저가 나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여기에 온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는 숨도 쉬지 않는듯 엄청 빠르게 호주식 원어민 발음으로 답을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못 알아듣는 티가 나면 안 될 것 같아 무조건 '예스!' '얍!'을 반복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간단한 이력서 양식과 희망하는 면접 시간을 적을 수 있는 간단한 지원서 양식을 건네주었고, 구석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천천히 적었다.
한참을 적고 있으니 갑자기 손님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치, 이게 맥도날드지! 아휴, 그런데 이런 속도에 내가 섞여서 일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바쁠 때 서류를 제출하면 센스가 없는 것이니, 피크타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이윽고 조금 카운터가 한산해지자 다시 매니저를 불러 작성한 서류를 드렸다. 그는 또 엄청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역시나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최대한 연기하며 끄덕였다. 그러다가 제일 마지막에 그가 말한 'around 7'만 알아들었다.
- 어롸운드 세븐?
내가 앵무새처럼 따라 한 그의 말에 끄덕이며 웃어주는 걸 보니, 이게 답인가 보다. 인터넷에 떠도는 맥도날드 면접 후기를 보면, 보통 그날 저녁에 합격 통보를 준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 후, 저녁 7시에 인터뷰 일정을 알려줄 거라고 혼자 이해를 했던 게다. 집에 돌아와서도 잠이 들 때까지, 그리고 다음 날까지도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며칠 후 다시 매장을 찾아갔다. 매니저는 인터뷰 날짜가 2월 7일이라고 설명해 주며 자세한 내용은 다시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라고 했다.
드디어 이제 다음 주면 꿈에 그리던 맥도날드 면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