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로비에는 예쁘게 꾸며진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사회 초년생인 내 눈에는 그 예쁜 것을 보고도 앞으로 30년을 매일 이 같은 건물로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모든 세상 사람이 설렘과 사랑으로 가득할 것 같은 이 행복한 날에도 나는 막내란 이유로 선배 방송을, 그것도 야간에 대신 뛰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내 서른의 크리스마스는 다를 거라고, 아니 달라야 한다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낼 거라는 마음으로 직장을 떠났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내린 결정이었고, 그때는 그 용기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인사팀장님께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하는 것이 예의인 줄 알면서도 용기 없는 소심함에 이렇게 펜을 들어 몇 자 적어봅니다. 작년 7월 입사하여 꿈에도 그리던 방송 MD가 되었기에 제 인생은 성공한 마냥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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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소통의 부재와 상대적인 박탈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단순히 업무가 많아서 힘들다,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루는 어떤 선임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삼각형을 그리더니 위에서부터 직급별 이름을 써내려 갔습니다. 제일 아래쪽에 제 이름을 써넣으시면서, 제가 제일 바닥이니까 일도 당연히 많지만, 그만큼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가장 많다고 훈계를 하십니다.
그동안 제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위로 갈수록 책임질 일이 많기 때문에 월급을 더 주는 거라고 배웠는데, 이 오랜 세월 받아온 교육이 현실과 다른 이상만 가르친 건지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또한 여기서는 칭찬을 기대하지 마라. 잘해도 중간이다. 더 잘하는 훌륭한 MD는 최대한 마진을 더 받아내는 것이다, 라고 하십십니다.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지요. 어쩌면 저보고 상처받지 말라고 진작에 해주는 이야기들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고, 일하기 즐거운 곳, 가슴 뛰는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 일을 찾아 떠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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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향을 내뽑는 매화가 되기보단, 조금 천천히 늦가을 고운 빛을 내는 국화가 되고 싶습니다. 저의 내면에 있는 가능성을 조금 더 확장하여 성공한 다음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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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의 내가 꿈꿨던 미래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금의 현실. 낯선 어느 외국 시골에서 외롭고 두려운 밤을 홀로 보내고 있다. 한국을 떠나 온갖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쓸데없는 고집과 열정이 이곳까지 몰아넣은 건 아닌지 후회가 됐다.
그 직장에 남아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았으면 지금쯤 대리로 승진은 했을 테고, 평범하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소박함이 어쩌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지금 이런 생각에 우울한 것도 어쩌면 그때 압구정 대표가 퇴사를 평생 후회할 거라고 말한 저주에 걸린 것 같아 억울했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만 돌아보고 있는다고 뭐가 바뀌겠는가? 더 멋진 새 삶을 살겠다고 일을 저질러 놓고는 가족에게도 거짓말까지 하며 도망쳐 와서는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보다 생산적인 일을 찾아야겠다. 그래야 한국에 돌아가서도 당당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
데이터를 충전도 할 줄 모르겠고 비싼 통신료가 아까웠지만, 투자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 생각에 과감히 핫스폿을 켜고 여기 근처에 있는 맥도날드를 찾아 다시 지원서를 냈다.
-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성공적인 호주 워홀러의 이야기를 써야겠어. 다른 건 몰라도, 꼭 맥도날드에 입사해서 우수사원까지 되어야지. 그래야 한국으로 돌아가도 이 경험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불과 2주 전 호주에 오자마자 지원서를 제출할 땐 없었던 온라인 검사가 추가되었다. 인성검사처럼 업무 중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객관식으로 묻는 수십 개의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해석이 어려웠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진실되게 선택했고, 그렇게 영어와 싸우느라 크리스마스 밤은 공포 속에 생각보다 빨리 흘려 보내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그다음 날 농장으로 새벽부터 다시 출근했다.
외국은 연말이면 보통 모두 문을 닫고 쉰다고 하던데, 40도를 넘나드는 호주의 땡볕 아래 농장은 예외였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빴다.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해서 오후 4시까지, 하루종일 밭을 기어 다니며 뽑아도 뽑아도 잡초는 끝이 없이 나타났다.
군대에서 조차 사격지휘병으로 펜만 잡고 있던 내가 키만한 농기구를 들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니 얼마나 어설퍼 보였을까? 농장주는 그런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매니저 데비(Debbie)는 워커들 중에 나를 제일 예뻐했다. 정이 많은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수건에 물을 묻혀 워커들의 목과 머리를 닦아 체온을 낮추도록 도와주었고, 매일 사비로 얼음과 생수를 사다 챙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 돈으로 얼음물을 매일 사 오는 게 부담이 됐는지, 어느 날 워커들에게 매주 1달러씩 동전을 모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와 가장 친했던 나는 자연스레 반장처럼 동전을 모아 매주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호주의 동전들을 자주 보고 만지다 보니, 비슷하게 생긴 동전들도 곧잘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내 한국 이름인 ‘지운’을 발음하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내가 어울리는 영어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Billy’라고 했고 그때부터 나는 ‘빌리’로 불리게 되었다.
올해가 이틀도 채 남지 않았다. 늦은 저녁 시간, 농장에서 친해진 한국인 워커들과 연말 파티 겸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며 민석이가 불렀다. 뒤늦게 도착한 자리는 이미 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마신 술과 고깃값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같이 나누어 내자고 했다.
2차 자리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래도 이왕 온 것 같이 합류해서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 나도 한잔 하며 한국에서 여러 직장을 옮기며 느꼈던 감정들과 호주에 온 이유, 여기 맥도날드에 취업하는 게 꿈이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형, 소설이나 쓰세요.
그는 그게 말이 되냐며,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 않을 땅이기에 벌금은 안내고 도망가도 된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얘들과 친해지겠다고 이 밤 중에 노력하는 내가 웃겨 그냥 집으로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이기에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걸어와야 했다. 귀신이 생각나 조금 무서웠지만, 내가 아는 건 한국 처녀 귀신과 강시뿐이었기에 여기서 보면 웃기겠다는 생각도 문득 했다. 외국 귀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타나면 내겐 어떤 모습일까?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날따라 그렇게 맑던 하늘도 흐리고, 달빛도 보이지 않더라. 뭐가 이렇게 속상하고 서러운지...생각해보면, 아무리 윤택한 삶을 살아도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게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그걸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건강한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선진국이라지만, 실상 나는 그냥 여기에 일하러 온 외국인 임시 노동자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마트에 지나다가도 호주 현지인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 그들은 너네들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서 싫다며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사건 이후, 민석이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하루 종일 같이 일을 해야 하니 굳이 나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게다. 그래서 불편했던 백패커 생활도 정리를 하고, 현지 문화를 접하며 조금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홈스테이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트나 길거리에 있는 게시판을 활용해 집을 구하거나 일상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시스템이라 머물 수 있는 가정집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시골에서 낯선 외국인을 받아 줄 주인이 몇이나 있겠는가? 결국 급한 대로 농장에서 일하던 다른 한국인 집에 방이 났다고 하여 바로 이사를 해버렸다.
그렇게 보낸 마지막 스물아홉의 날들. 달력의 한 페이지를 새로 넘기듯 평범한 일상의 연속에서 새해를 맞이했고, 서른살 Billy가 되어 어느새 농장 생활에 잘 적응하며 외로움과 새로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