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만 십 년을 넘게 해 오던 내가 경력직으로 이직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선물로 남들처럼 긴 여행을 떠나는 등 나를 위한 어떤 보상이나 사치라는 카드는 써보지도 못한 채, 바로 분당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
그만큼 부담도 컸다. 빠르게 입사를 원하는 것은 그만큼 업무 공백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빨리 적응하고 네 몫을 해내라며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경력직으로 뽑혔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해당 팀에서는 그 자리를 빠르게 메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조직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규모가 큰 회사만 다녔기에 R&R이 비교적 명확했었다. 비록 신입으로 입사 하더라도 그때마다 대개 IT지원팀에서 PC 환경을 세팅을 해주었기에 내가 별도로 신경 쓸 일이 없이 바로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사무직에게는 어쩌면 사소하면서도 당연한 업무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IP를 직접 설정한다 거나 공용 프린터기를 설치해 본 적이 없었다.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와 모두가 카카오톡을 하고 있을 때도 나는 011을 고집하며 몇 년이 지나서야 어쩔 수 없이 바꿨고, 집 인터넷도 기사님들이 알아서 설치해 주었기에 기술에 무관심했다.
첫 출근을 하니, 책상 위에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윈도우가 아닌 회사 자체 OS가 깔려 있는 것은 살면서 처음 본 게다.
- 미쳐버리겠네. 아니 이걸 어떻게 쓰라는 거야
포장을 뜯고 이것저것 설치하려니 멘붕이 왔다. IT 회사에서 이런 기초도 모른 채 경력직으로 왔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들킨다면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옆자리에 있던 해진님이 척척 설치를 도와주었다.
이 회사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같은 복잡한 직급 체계 없이 모두를 '매니저'라고 불렀다. 호칭 변경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과도기인지 '~매니저님' 또는 '~님'을 혼용하여 사용하곤 했다. 팀원들의 평균 나이는 나보다 8살이나 어렸지만, 우리는 꽤 잘 어울려 지냈다.
복잡한 사무실 구조 탓에 정수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정신없이 적응해 갔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 경력직이란 부담감에 마음이 바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인상이 중요한 만큼 업무를 받을 때마다 최대한 빠르게 잘 해내려고 노력했다. 상사의 업무 스타일을 몰랐기 때문에 같은 장표라도 1안, 2안 등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 보고하며, 그의 선호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몇 달 후, 회사에서는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 맞춰 AWS와 협업을 통해 신제품을 만든다며 TF팀을 꾸렸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티가 나는 법. 내 옆자리 해진님이 우리 팀에서 가장 먼저 차출되어 프로젝트 초기 멤버로 떠났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DX):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기업의 비즈니스 방식을 혁신하는 것을 의미함. 현장에서는 업무 자동화나 기존 레거시 제품을 Cloud화, SaaS화 따위로 전환하고자 함
나도 관심은 있었지만, IT 전문성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던 터라 부러워만 했을 뿐 프로젝트에 합류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면서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해졌고, 해진님의 추천과 팀장님의 지원 덕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다.
말로만 듣던 애자일 개발 방식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AWS 전문 운영팀이 상주하며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매일 아침 스크럼 미팅을 통해 진척 상황을 공유하고, 스프린트 단위로 업무를 진행하며 기존과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렇게 더 큰 미래를 그리며 열심히 일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하지만 연말에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AWS Re:Invent 행사의 참가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부스 규모가 워낙 큰 만큼 준비하고 운영하는데 많은 인원이 필요했지만, 비용 절감을 이유로 현장 운영인력은 단 5명 정도만 데리고 간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처음 추진하는 해외 박람회이고 무엇보다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필요했기에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는다고 했다. 누가 봐도 엄청 빡세고 힘들어 보이는 일정이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IT 박람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과 4일간의 현장 행사가 끝나면 주말엔 현지에 머물며 미국을 여행할 수 있는 자유시간을 준다는 말에 다들 관심이 많았다.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요구한다는 운영팀장의 말에 기가 죽었지만, 호주에서 개척한 깡을 바탕으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영어 인터뷰 대본을 준비하며 연습했다.
면접은 대개 한국어로 진행하고 지금 한 말을 영어로 해보라는 흐름으로 갈 줄 알았는데, 면접 당일 운영 팀장님은 특유의 발랄함과 자신감 넘치는 발음으로 영어 질문을 바로 마구 쏟아 내셨다. 순간 그 포스에 압도당했고, 외운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오죽하면 틀니가 없는 노인처럼 윗입술이 안쪽으로 말려 올라가 발음도 샜다. 상무님은 괜찮으니 어려우면 한국어로 답을 해도 좋다고 하셨지만, 꾸역꾸역 영어로 답을 해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호감을 샀는지, 아니면 호주 워킹홀레디에 경험과 전 직장에서 상해 뷰티 박람회 같은 대형 행사 운영 경험을 인정받은 건지 운이 좋게 최종 선발되었다.
그 후로 매주 모여 행사 준비를 했다. 모두 학벌이 좋고 해외 유학 경험이 있어서인지 영어 실력이 뛰어났고, 그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작아졌다. 하지만 누구보다 부스 운영 경험은 많았기에, 전면에 나서서 고객을 응대하는 것보다는 매끄럽게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현장에서도 고객에게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비좁은 창고에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거나 이벤트를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뒤에서 뛰어다녔다.
낮에는 행사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라스베이거스를 구경했다. 그렇게 화려할 것만 같았던 겉보기와는 다르게 꽤 낡은 풍경이 많았다. 빛바랜 건물들 속에 신기술 공존하는 세계에서 1주일을 보냈다. 그리고는 돌아오자마자 연말 인사 평가와 신년 업무 계획 보고서 작성으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시기에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겹쳤다. 3년을 기다렸던 청약된 집 잔금 마련에 실패했고 그 와중에 남은 대출, 믿었던 친구에게 당한 사기로 희망을 잃은 채 하루하루 버티던 시기였다. 게다가 새해가 되면서 팀장과 상무 모두 퇴사를 해버렸고, 형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 폭풍 속 회사에서는 내게 팀장직을 제안했다.
나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일에 미쳐 살라고
그렇게 하루하루 바쁘게 보면 살아지는 거라며
평소 믿지도 않던 신이 나를 살게 하려고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인데
그래도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께 선물 하나는 해드리고 싶었다.
죽기 전에 인생에서 딱 한 곳만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묻자, 부모님은 중국 장가계라고 답을 하셨다. 그렇게 그달 받은 급여를 모두 털어 여행 패키지를 예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