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팀장이라는 완장

by 공대오빠

장가계 여행을 다녀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 스트레스의 무게를 얹은 만큼 팀원 관리를 잘하라는 의미에서 법인카드를 내주었다.


동료에서 갑자기 팀장이 된다는 건 이직하는 것만큼 꽤 부담스러웠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인 데다 그것도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제품을 기획하는 기획팀의 장(長)이란 명함은 꽤나 무거웠다.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을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회사의 방향을 이해하고 나와 함께 투덜댔던 이들을 끌고 가야 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고맙게도 이런 내 마음의 무게를 읽었는지, 팀원들은 같이 으쌰으쌰 잘해보자며 힘을 모았다.


어쨌든 팀장이 되었으므로, 그동안 여러 회사를 거치며 내가 싫어했던 팀장들의 모습은 최대한 지우려 다짐했다. 회사라는 곳이 즐거울 수는 없어도 최소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기 싫은 곳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지겹게 강요당했던 저녁 술자리 회식을 없애고, 그 돈으로 매일 아침 팀원들과 커피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의미 부여를 하며 팀원 한 명 한 명 잘 챙겨주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우리 팀 막내가 입사 1주년이 되었을 때는 아침 일찍 출근해 근처 떡집에 가 백설기를 사 오기도 했다. 순백의 깨끗한 도화지 같은 마음에 오래 다니길 바라는 장수의 의미를 더해 커리어를 잘 그려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업(業)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싶었다. 하루 출퇴근 5시간을 대중교통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공부를 했다. 또한 팀원들과 함께 성장하기 위해 자기 계발을 독려했다. 그 방법으로 SQLD 자격증 시험 모임을 만들어 불합격하면 저녁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주말에 시험이 끝나고는 고사장 근처 공원에 모여 정답을 맞혀 보고 피크닉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니, 회사에서는 내게 우수직원 상을 주었다. 우리 팀이 신제품을 만들기에 고생하라는 의미에서 대표로 준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들었다. 서비스 기획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자꾸 회사에서는 더욱 DB 전문성을 요하는 제품기획 업무로 방향을 바꿨다. 기획팀이 개발팀까지 리딩을 해주어야 할 판에, 회의에서 자꾸 우리의 역할을 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지친 게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작년 말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오랜 친구의 배신과 그로 인해 3년을 꿈꾸던 아파트 입주가 무산된 일 등)이 뒤늦게 후 폭풍으로 몰려왔다. 그땐 며칠을 울면 다 털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믿기지도 않았던 게다. 그렇게 나는 회복탄력성이 꽤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어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로 와닿기 시작했다. 그 청춘과 바꾼 시간에 대한 나의 노력과 진심들이 고통스러운 상실감으로 변해 이루 말할 수없이 커져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무기력과 우울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출근길에 자꾸 나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에너지가 없으니 지하철에서 공부는커녕 앉으면 눈이 감겼고, 매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조차 무겁고 모든 소리가 거슬려 두통이 왔다. 매일 아침 티타임과 점심시간조차 누군가와 함께 마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자꾸 무언가 잊어버리기 일쑤였으며, 이상하리만큼 타인이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혼자가 되어갔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조직개편으로 인해, 몇 명이 우리 팀으로 전배를 와서 관리해야 할 인원은 더 늘어났고 회사는 계속해서 경영난이라는 소문이 돌며 어수선했다.


그 와중에 내 위로 새로 온 조직장은 비용절감과 효율적인 인력 관리를 위해 팀원 개개인의 R&R에 세세한 관심을 가졌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내게 더 타이트한 팀 운영을 요구했다. 중간 인사평가 겸 각자 진행하고 있는 업무들에 대해 확인이 필요했고 늘어난 인원과 업무만큼 각자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면담을 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신에게만 일이 몰린다고 생각했던 건지, 이러이러한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러면 팀장님은 무슨 일을 하냐며 역으로 물었다. 또 어떤 이는 하루 종일 파티션 넘어 바쁘게 두드리는 나의 키보드 소리를 듣고는 내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이직 준비를 한다거나 회사 익명 대화방에서 욕을 하기 바쁘다며 오해를 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녀를 불러 나의 개인 모든 대화를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과는커녕 오히려 내가 불안하게 만드는 이 조직관리와 부족한 기획업무의 전문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어렵게 쌓아온 커리어가 이렇게 무너지는 건 원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다시 처음 팀장을 달았을 때처럼 팀원들의 지지를 받아 같이 힘을 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사실 작년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매일 저녁 일기를 써왔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날도 퇴근하고 방에 혼자 일기장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그래, 나는 기획자잖아! 그것도 팀장이라면 이 우울함에 갇혀 무기력하게 상황을 악화시킬 게 아니라 먼저 내 인생부터 다시 제대로 기획해 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차라리 지금의 상황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역으로 팀원들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새 팀원들에게 전할 말을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그리고 다음 날, 모두를 모아 용기 내어 말했다.





회의 시작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술을 한잔하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바라는 그림, 여러분들이 바라는 그림이 많이 다를 거예요.


가족과도 마음이 맞지 않고, 내가 고르고 골라 사귄 애인과도 싸우는데 이렇게 타의로 묶여서 맺어진 팀이 사이가 다처럼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어제 문득 개발팀과 회의를 하고 오는 길에, 뭐만 하면 다 아래로 업무를 내려대는 윗분들 때문에 무척 힘들고 외롭단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여러분들도 제게 불만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어요.


이 타이트한 회의 시간에 앞서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저에 대한 이해가, 그리고 신뢰가 있어야 이 혼란의 시기에 이 팀이 잘 나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에요.


몇몇 분에게는 말씀드렸지만 요새 우울감이 너무 커서, 자꾸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힘들었어요. 뭐랄까;; 나보다 더 나은 리더를 만나지 못한 여러분들에 대한 미안함이 매우 커졌고, 하나하나 섬세하게 챙겨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말하고 싶었어요.


힘들다는 말을 제가 원래 잘 안 해요. 아니 못해요. 가까운 가족에게 조차...


그래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저는 여러분을 신뢰하고 좋아해요. 어쩌면 제 수많은 직장 경험 중에 이렇게 좋은 팀원들을 만날 수 있음은 늘 감사해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더 같이 잘 나아갔으면 해요.


혹자는 자꾸 제가 까먹고 놓친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람 뇌가 컴퓨팅처럼 쓸 수 있는 한계치가 있다는데 이 우울감과 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그거에 많이 할애돼서 나도 모르게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아요. 그 부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불필요한 건 최소화하려고 내 딴에는 SNS도 끊고 , 자극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거든요.

점심도 그래서 혼자 와서 쉬면서 회복하려고 하는 거고...


지금 저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팀장이기 이전에 지금 같은 배를 타고 가고 있는 한 명으로서 이렇게 많이 아프니까 좀 봐달라는 의미예요.


그래도 내 딴에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이 진심이 어떻게 전달될지는 모르겠으나;;

요 며칠, 지금 들어오기 전까지도 많이 고민하며 용기 내 하는 말이니 알아주면 좋겠어요.





그동안 스쳐간 많은 팀장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텐데, 이해하지 못하고 매일 불만을 갖고 욕을 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모두가 내 마음 같을 수가 없겠지. 돌이켜보니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행위가 더 팀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리더의 그릇 크기가 아닌 것 같았다. 내 위의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해 몇 번이고 직책을 내려놓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상위 1%의 리더십이 있는 인재라며 IT에 걸맞은 사람이라 칭찬했다. 그러면서 팀을 통합하며 더 많은 인원을 내 아래로 넣어주려고 했다.

내가 계속해서 회사를 다니는 이유, 아니 다녀야 하는 이유가 거창하게 자아실현을 한다 거나 무언가 알 수 없는 꿈 따위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삶이라는 긴 인생의 여행에 돈이 필요했고, 지금은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더는 지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존버하는 삶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팀장으로서의 역할과 개인적인 행복 사이에서 갈등했고,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keyword
이전 20화천당 아래 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