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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오리 새끼

by 공대오빠

연락이 오는 헤드헌터의 유형은 다양했다.


어떤 이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JD(직무기술서)를 대뜸 보내고는 스스로 생각해 보고 맞다면 지원해 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자기네 이력서 양식으로 일단 맞춰 보내면 어울리는 곳을 찾아 추천을 보겠다고 했다. 마치 그물을 던져 하나만 걸리길 바라는 모양으로 제안을 마구 뿌리는 느낌이다.


지원자의 커리어를 생각해 직접 만나보고 어떤 직무가 적합한지 같이 고민하며 연봉 계약 서류를 들이미는 장면은 드라마에나 나오거나 진짜 대단한 사람들에게의 이야기인 듯했다. 그저 대리 나부랭이는 한 번이라도 더 면접을 보게 해서 합격시키는 게 목적이므로 그저 수수료나 한몫 챙기려는 것 같았다.


반면, 좀 더 성의 있게 직무와 회사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내가 보낸 경력기술서를 좀 더 돋보이도록 가이드를 여러 번 해주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피드백을 받아 계속해서 수정하고 다듬다 보니, 나의 경력기술서는 나름 괜찮은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내가 지원한 직무는 주로 마케팅이나 어깨너머로 배운 서비스 기획 분야였다. 여러 곳에 지원을 했지만, 짧은 경력으로 서류 통과조차 쉽지 않더라. 경력직 이직은 신입사원과는 다른 것 같았다. 기업들은 내가 해온 직무를 중심으로 새로운 환경에서도 적응하고 바로 실무에 투입되어 스스로 일을 해낼 수 있길 바랐다.


면접은 대게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공채처럼 실무 면접과 임원 면접까지 최소 두세 번씩은 진행되었다. 기존 업무가 바빠 연차 쓰는 게 눈치를 보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연차 사유를 설명해야 하는 분위기에 티 나지 않게 거짓말을 요령껏 하는 것이 곤욕이었다. 그럴 때면 갑자기 새벽부터 배탈이 났다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외국인 약혼자의 부모님을 공항에 마중 가야 한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모레퍼시픽에서 디지털 마케팅 경력직으로 이직 제안을 받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그렇게 가고 싶을 때는 탈락시키더니, 그동안 경력을 잘 쌓고 참고 버텨온 내가 대견했다. 꿈만 같았지만, 꿈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의 여행 약속도 취소할 만큼 정성을 다해 다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사측은 과거에 지원한 기록을 언급하며 서류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참 허무했다.


그 시기에 같은 그룹사에서 비밀리에 이직 제안을 몇 군데 받기도 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음 직장과 직무는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최선인지 고민을 하며 여름을 다 보내버렸다.


야근과 술에 찌들어 커피로 버티던 어느 날 오후, ‘031’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한 달 전에 취업사이트를 통해 온 이직 제안을 무심코 승인했었는데, 이후 회신이 없어 잊고 있던 곳이었다. 팀장이라는 사람은 코로나로 인한 자가 격리로 이제야 연락을 드린다며 사과를 했고 면접을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 음, 요즘은 비대면으로 화상면접도 많이 하던데, 그렇게 하시죠? 저 연차도 거의 없어서 사용하기가 어려워서요.


그가 설명한 회사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직무는 소프트웨어의 가격 정책 수립과 시장 조사, 사업 방향성 수립 등의 업무였다. 수화기 너머 설명해 주는 미래의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여기저기 연거푸 불합격을 먹다 보니, 얼마 남지도 않은 연차를 그렇게 또 소진해 버리기는 아까웠다.


어찌 보면 나의 대답은 미래의 직속 상사가 될 수도 있는 분께 다소 무례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고, 상무님도 1차 면접을 함께 하셔야 하니 꼭 대면으로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내 근무지를 확인하고는 퇴근 후 기다릴 테니 오후 7시 30분에 면접을 보러 오면 좋겠다고 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그의 태도에 홀려 일단 알겠다고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생전 처음 듣는 DBMS(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전문 회사라니! 이직 고민은 최종 합격하고 볼 일이다. SOS를 치자, 퇴사한 개발팀 후배들이 회사 근처까지 달려와 속성 IT 기초 강의를 해주었다. 데이터베이스란 무엇인지, 실무에서 데이터가 어떻게 움직이고 활용되는지 그림을 그려가며 면접 준비를 도와주었다.


IT의 메카 판교! 비록 그 중심에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근처인 분당에서 근무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미래에 유명한 세계로 입성하는 기분이었다.


면접 당일,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을 찾아갔다. 현재 집에서 사무실까지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여기서 다시 분당까지 한 시간이 더 걸린다면 하루 출퇴근만 거의 다섯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저소득 근로자를 탈피하기 위한 전략이라 해도 막상 기회가 오니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이 선택이 내게 최선일지 고민됐다.


우리 회사는 저녁 7시가 넘어도 다들 한창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일인데, 여기는 진짜 요즘 것들을 위한 트렌디한 IT기업문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는 모두가 퇴근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텅 빈 사무실 한켠 빈 방에서 내게 전화를 주셨던 팀장님과 상무님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상무님은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학벌을 중시한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었기에, 서울대를 나온 그의 기준에는 내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팀장님은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기술 관련 질문에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고 인정했고, 기획했던 AICC 솔루션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게 답했다.


IT 트렌드가 빠른데 어떻게 따라갈 것이냐는 상무님의 질문에 <트렌드 코리아> 집필진 활동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기술 분야를 더 깊이 파볼 계획이라고 답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님이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5년째 참여 중이라고 하자 상무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말도 안되는 학연의 끈 끄트머리를 잡아챈 덕에 1차 면접을 통과했고, 최종 임원 면접도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연봉 협상. 정말 쉽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 없지만, 이틀 동안 수차례 전무님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조율한 끝에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연봉 상승을 이뤄냈다. 사실 돈을 제외하고는 출퇴근 시간은 더 길어졌고, 기업의 규모는 더 작아졌으며 직무의 확장성 더 좁아지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나를 귀하게 여기고, 업무 능력과 가치를 존중해 주는 사람들과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겠다는 것이 가장 컸다. 어쩌면 십 년째 신입사원을 하며 대리 나부랭이로 살아온 내가 가장 바라던 ’ 인정’ 이란 가치에 목이 많이 말라 있었을 지도...


5년 가까이 한 직장을 다닌 곳은 여기가 처음이므로 그새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동기들의 힘이 가장 컸다. 새벽까지 같이 수다떨고 맛있는 거 있음 젤 먼저 챙기는 사택 멤버 거니, 호진, 상학, 예슬이! 힘들 때 술 한잔 하며 욕을 맛깔나게 대신 해준 수빈, 우상이. 그리고 저 멀리서 늘 응원해주는 정 많은 남길이와 지서. 친동생 시집 보내는 마음으로 늘 함께한 재희, 뭐 하다 막히면 젤 먼저 뛰어와 도와준 개발 천재 태호까지! 11명의 동기 덕에 내 생에 가장 오래 다닌 직장으로 기록할 수 있어던 게다.


그렇게 바라던 퇴사였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길어질 퇴사 면담도 꽤 부담스러워, 그냥 원래 하고 싶었던 화장품 쪽 마케팅일을 하기 위해 이직을 한다고 둘러대버렸다.


마지막 출근 날, 서울 누이라고 불렀던 옆 팀 선배는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카페라떼를 사주고 싶다며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 진짜 여기 탈출을 축하한데이, 고생 많았다. 니가 그동안 운이 억수록 없었던 겨. 너를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았던 거지. 오리 알제? 근데 진짜 승자는 너다. 사실 넌 백조였으니까!


- 부끄럽게 무슨요;


- 넌 모르제? 니 최고의 장점이 뭐지 아나? 선한 영향력! 쭉 봐온 널 보면, 내 입으로 이런 말 처음 꺼내보긴 한데 딱 그거다.


기분이 이상했다. 호주를 떠나기 전 다짐했던 인생의 목표를 이렇게 누군가의 입에서 들을 수 있어 놀라웠다.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해주니 부끄러웠다. 아니, 어쩌면 아직은 많이 부족한데 익숙하지 않은 긍정 평가가 낮아진 나의 자존감과 충돌한 걸 지도 모르겠다.


업무 인수인계 파일을 전달하고, 노트북을 포맷했다. 책상 서랍까지 모두 치우고 나니, 내 짐이라고는 명함 한통과 싸구려 다이소 슬리퍼 한 켤레, 탁상용 선풍기가 전부였다. 너무 단출한 짐에 서운했지만, 동기들과 포옹도 하고 사람들이 로비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니 감동이었다.


사실 그러고 보면, 팀장도 표현이 서툰 거지 나를 좋아하긴 했던 것 같다. 그날도 그는 사무실에 없어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지만, 집에 도착하니 선물을 보내주셨다.


샤프와 볼펜.


기획자가 든 펜은 곧 칼과 같다는 그의 말이 떠 올랐다. 이왕 받는 것, 그 세월을 잊지 않으려 ‘미운 오리 새끼 탈출’라고 각인을 신청했다.

고마웠다. 동기들아, 그리고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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