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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오빠 Nov 04. 2024

한국이 싫어서 (1)

퇴사가 반복될수록 서류합격률은 낮아졌고, 어렵게 입사를 해도 월급은 처음 받았던 것보다 점점 더 작고 귀여워졌다. 그만큼 불안과 후회는 지수함수로 커지더라.


무더운 여름 습기에 푹 쪄진 풀때기처럼 지쳐있는 내게 대학교 친구 현지는 힘을 내라며 압구정에 있는 아동복 회사에 일자리를 알아봐 준다고 했다. 별도로 요구한 양식이 있던 건 아니라, 그냥 가지고 있던 평범한 이력서를 메일로 보냈다.


그렇게 팀장이라는 사람과 한 시간 가까이 면접을 보았고, 그는 내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끝나고 따로 커피도 사주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만나 온 일반적인 중년 꼰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30대 초반의 동네 형 같은 다정함으로 내 삶과 생각에 관심을 보였고, 몇 개월짜리 이력으로만 채워진 경력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며 함부로 말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도전적인 모습이 멋지다며 응원해 주었다. 그런 사람이 나의 팀장이라면 오래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있는 H&M 매장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아는 척 인사를 건넨다. 바로 그 팀장이었다. 그는 시장조사를 하러 나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또 커피를 사주었고, 꼭 최종 면접에 합격해서 같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 어쩌면 이건 신이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만 떠돌고 좋은 사람과 함께 정착하라는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임원 면접을 보러 갔다. 폭염 속에 넥타이를 목 끝까지 조여 맨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대표는 에어컨이 빵빵 나오는 본인의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찌르면 피가 나올 만큼 뾰족하게 잘 깎인 연필을 한 손에 들고는 내 이력서를 위에서부터 가볍게 훑었다.


찍-

이력서에 인쇄된 글자들이 아마 말을 할 수 있다면 비명을 질렀을 게다. 그 날카로운 연필로 내 이력서 첫 줄에 적힌 주소와 가족 정보를 그으며 말했다.   

 

- 집도 인천이라 멀고, 부모님도 고졸이네? 뭐 자랑이라고 이걸 여기에 써놨어?     


그는 이어 또 반말로 말했다.     


- 청년인턴을 대체 왜 하는 거야? 최저 시급이겠지? 너 같은 애들이 세금을 제대로 안 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대신 더 내느라 등골이 휘잖아. 지난달에 내가 얼마를 냈더라? 여하튼 내 딸은 너랑 동갑인데 악기 수업으로 시간당 몇십만 원씩 벌어. 자고로 성인이라면 세금을 많이 내야지.     


- 홈쇼핑 다녔었다고? 그 큰 회사를 퇴사한 건 아마 평생 후회할걸?! 내가 이쪽은 꽉 잡고 있는 거 알지? 00(경쟁사)도 우리 그룹사인 거. 다신 MD로 다른데 못가 게 할 테니까 이직이니 뭐니 딴생각하지 마.   

 

말을 저렇게 지읒같이 해 놓고는 합격했단다. 그리고는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미친놈 아닌가? 네가 뭔데 내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는 거냐며 그 앞에서 이력서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 드라마처럼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소개해 준 현지의 얼굴이 생각나 꾹- 참고 또 참았다. 내가 무얼 잘하는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지 고민해 온 소중한 시간을 모두 부정당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대기업 껍데기를 벗어버린 걸 평생 후회할 거라는 저 말이 내겐 잔인한 저주로 들렸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오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압구정답게,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퉁퉁 부은 얼굴을 붕대와 마스크로 가린 채 거리를 걷고 있지만, 나는 어느 가림막 하나 없이 눈물이 범벅된 민얼굴로 펑펑 울며 걷고 또 걸었다.


중고신입은 여러 곳을 떠돌다 멍든 바나나처럼 가치가 떨어진 상품으로 취급 받는 기분이었다. 어설픈 경력이니, 학벌이니, 이런 쓸모없는 스펙을 이력서에 가득 채우느라 고생하는 짓은 그만해야 겠다. 멍든 껍질은 모두 벗어 버리고 내 이름 세 글자와 이 몸뚱이만으로도 알아봐 줄 곳으로 가야겠다.   


웃기지 않니?  도대체 어디든 1년은 채워야 한다는 경력 기준은 누가 만들었는지... 취업 준비만 하다가 이십 대가 모두 가버렸다. 그러니 그렇게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어도 반복되는 취업 준비로 늘 가난했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고 싶어졌다.      


곧 다가 올 서른 살의 생일을 초라하게 방에 틀어박혀 백수로 맞이하는 정말 싫었다. 남들처럼 외국에 살아보지 못해서, 유학 한번 가본 적이 없어 영어를 잘하지 못해 인생의 선택지가 좁아진 것에 대하여 환경을 더는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한국을 떠나 새로운 길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고민을 친구와 나누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진짜 쉽고 빨리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 이거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단체 소풍을 다녀와서 남는 회비라며 선생님이 돌려준 몇 백 원조차 다시 부모님께 가져다 드릴 정도로 바른 아이였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모범학생상, 선행상 따위를 받던 누구보다 성실한 아이였기에 부모님을 속이는 건 참 쉬울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다.     


그날 오후, 서점에 들러 호주 여행책을 한 권 샀다. 일단 도시로 가야 안전할 게다. 시드니나 멜버른은 워낙 유명한 도시라 빌딩이 높은 만큼 외국인의 콧대도 높아 밥벌이를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청소를 하든 식당에서 서빙을 하든 일자리 경쟁은 꽤 치열할 것 같아 도저히 안 되겠다.   

   

그렇다면 다른 도시 중 '브리즈번'은 어떨까? 생전 처음 들어본 미지의 이름이지만 무언가 이름이 이쁘기도 하고, 지도를 펼쳐 놓고 한국에서 직선으로 자를 대어 그어도 다른 두 도시보다 거리가 더 짧았다. 그 몇 센티미터 조금이라도 가까운 게 내가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정한 이유의 전부였다.     


어느 친절한 블로그 글을 찾아 차근차근 따라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날 저녁, 깨끗한 종이에 10년 후 나의 예상 소득과 그동안 모을 수 있는 자산을 써 보았다. 지금부터 일반적인 한국의 중소기업에 취업했을 경우와 호주를 다녀와서 영어를 장착하고 재취업했을 경우를 비교했다. 호주를 다녀오는 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자연스레 수입을 높여 계산을 하게 되더라. 그 어설픈 인생 계획서 한 장을 들고 엄마한테 달려갔다.      


- 엄마! 요새 호주에 한국어 붐이래요. 갑자기 운이 좋게 내가 그 인턴십 했던 대학교 취업센터에서 선생님이 소개를 시켜주셔서 한국어 보조 교사로 가게 됐어요. 다다음주에 겨울 방학 시작하면, 바로 일을 해야 하니 출국이 실제로 2-3주도 남지 않았어요. 딱 1년만 하고 올게요.


당황하는 엄마의 표정을 지우려 거짓말에 거짓말을 계속 보탰다. 공항에 도착하면 학교 측에서 교직원이 마중도 나올 거고 바로 대학교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니 숙식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니 갈 때 편도 티켓만 있으면 되고 용돈도 필요 없다고 했다. 가자마자 바로 보조 수업을 시작하면 주급제(週給制)라 그다음 주부터 돈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생활하는데 문제는 전혀 없을 거라고 쉴 새 없이 둘러댔다.


엄마는 추운 날, 갑작스러운 이별이 서운하다며 백화점에 가 두꺼운 패딩을 한 벌 사 주셨다. 나는 그 따뜻한 옷을 입고 신촌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눈이 오면 그렇게 흐리고 짜증만 났던 게, 그날은 보슬보슬 가랑눈이 내려 옷이 젖지도 않고 뽀송뽀송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호주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신체검사를 하고 나서 바로 이튿날 비자 승인 메일이 왔고, 12월 9일 브리즈번행 편도 항공권과 노트북을 사고는 호주돈 1,000달러를 빌려 환전했다.


그날 저녁, 호주 브리즈번에 있는 큰 공원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야간 청소를 하러 가던 한인 여대생이 살인을 당하는 사건을 다룬 뉴스 특보가 실시간 도배 중이었다. 그러더니 주말에는 다큐멘터리 특집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문제점을 방송했다.



이제 출국까지는 1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한 채 겁이 났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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