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삶을 기술하는 뒷 장의 내용을 먼저 작성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읽어보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고, 0장을 추가했습니다. 현대의학은 무엇을 하는지, 어떠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이해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의학은 과학인가요? 최근에 받은 질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보고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학이 현대 사회의 기초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고, 진짜 과학과 가짜 과학을 구별하려는 열띤 토론 중에 사회자가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을 계기로 내가 하는 일에 조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은 현대 의학은 과학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양의사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불쾌해합니다. 별다른 의도 없이 한의사가 있으니 의사도 양의사라고 불러야 한다는 공평의 관점에서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양의 경제학 체계가 있고, 동양-한국의 경제학 체계가 있었다고 해도 동양사회인 한국에서도 서양의 경제학 체계를 따르고 공부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경제학은 서양의 현대경제학을 따르고 양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유사합니다. 현대의학은 어쩔 수 없이 현대과학과 철학을 이룩한 서양의 관점에서 진행됩니다.
현대 과학은 무엇을 기반으로 할까요?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가설을 세우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설을 검증해야 합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가설도, 연구비가 많이 들어간 연구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폐기됩니다. 의학도 같은 방법으로 검증됩니다. 누군가가 대단한 치료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 치료 방법이 안전한지 효과가 충분한지, 기존 치료에 비해서 나은지 아닌지에 대한 검증을 받지 않은 채로 수행하게 되면 엄격한 처벌을 받습니다. 설령 치료 효과가 좋았다고 해도 옳은 치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약과 새로운 치료방법을 개발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갑니다. 신약이 될 후보 물질을 고르는데서부터, 안정성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동물실험, 2상, 3상 연구를 수행합니다. 특정암을 치료하는 물질에서부터 고혈압약과 같이 흔하게 쓰이는 약도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칩니다. 어떤 약이 2상까지 치료 효과가 매우 좋아서 모두 기대감이 큽니다. 적게는 수십억에서 수백억 투자가 들어간 상황입니다. 그런데 3상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되었습니다. 연구 중에 이유 없이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환자의 수가 많다든지, 예상외로 치료효과가 기존의 약과 비교했을 때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치명적인 부작용이 보고되면 즉시 연구도 중단되고 연관성이 없다고 판정되기 전까지는 더 진행되지 않습니다. 수백억의 손해가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안전하지 않은 약을 출시할 수는 없으니 유망주였던 신약은 사라집니다. 결과를 조작하려고 하다가 적발되면 바로 퇴출돼버립니다. 효과가 좋은 약아서 널리 쓰이던 약도 큰 부작용이 의심되면 언제든 회수되고 다시 검토를 받게 됩니다.
또 하나 멋진 점은 밝혀낸 의학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됩니다. 신약에서 특허권이나 기술적인 면은 물론 보장을 받아야 새로운 약을 개발할 동력이 되므로 유지되지만 연구에서의 성과나 논문은 이름 있는 학술지에 등재되어 대부분 공개됩니다. 특정 병원이나 의사가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도 근본적으로 독점할 수 없고, 기술을 공유하고 나눕니다. 새로운 수술방법이 기존의 것보다 낫다면 학술대회에서 검증하고, 실제로 그러하다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이 기술을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약이 더 우선하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상황에는 다른 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정리합니다. 여러 논문으로 아주 합당하면 근거 수준 A. 그보다는 못하지만 경향성을 보이면 B. 등등 순으로 정리하고 주장을 근거할 만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나 현장에서 근무하는 의견을 종합할 때 권고사항은 전문가 의견으로 따로 기술합니다. 권위 있는 의사 한 명의 주장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 수 없고, 현장에서 확실해 보이지만 논문으로 밝히기 어려운 내용은 가이드라인 한편에 참고사항을 적습니다. 시험을 하도 많이 봐서, 이런 정리 측면은 의사들이 상당히 전문성을 보입니다.
이렇듯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방법이 개발되고 정리된 치료법은 교육을 통해 의사들에게 전수됩니다. 의사면허증을 얻으려면 이 교육을 충분한 시간 받았고(의과 대학졸업을 했고) 자기 것(의사면허시험 통과)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의 몸을 맡기는 의사와 병원이 이러한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믿음 위에서 치료 과정이 진행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의학은 과학인가요?” 하는 질문에 저는 “네. 의학은 과학입니다.” 하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아름답게 입력 출력이 되는 것이 아니고 치료 과정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정해진 의료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을 것인지, 예를 들면 고가의 항암제를 모든 암환자에게 투여할 수 없을 때 이 금액을 국가가 보조해 줄 것인지 시장의 원리에 맡길 것인지, 충분히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으니 아예 투여할 수 없도록 막을 것인지, 암 치료 비용을 고혈압, 당뇨 예방과 같은 다른 질환에 투자할지 같은 정책적인 측면도 누군가는 고려해야 합니다. 일선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이러한 정책적인 고민은 아니더라도 내 눈앞의 환자가 좋은 치료제를 사용하고 싶은데, 비용적인 부담으로 꺼리거나 더 나아가서 아직 국가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못할 때 괴리감을 느낍니다. 또 같은 치료, 확률적인 치료를 하더라도 반응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암의 90%를 치료하는 항암제가 개발되어 사용된다고 가정할 때 진단 당시에 치료 효과는 희망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치료 실패 10% 에 해당된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확률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죽음을 선고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유전자 치료와 같은 치료의 고도화가 이런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 주고 있지만, 모든 질병의 완전한 극복은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따라서 현장의 업무는 숫자로 알 수 없고, 어떤 사람의 성향, 치료 의지, 환경, 재산, 수혈을 거부하는 종교 등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의학은 이렇듯 분자생물학, 유전학 같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부터, 자본주의의 논리가 들어가는 시장, 자원의 분배 같은 정책적인 문제, 미용성형과 같은 서비스 행위로써의 의료, 삶과 죽음, 정신건강 등을 다루는 영역, 치료의 응급함을 다투는 응급의학과 만성질환을 다루는 영역 등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생각보다 큰 의학 안에서 의사들은 어떤 길을 가고 고민하는지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