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의사가 좋은 직업인지 논하기에 앞서서 좋은 직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공과 직업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것보다 주어진 성적과 능력을 가지고 어떠한 선택을 하는지가 인생을 훨씬 더 많이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잠깐 곁다리로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면 저는 학생 때 수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고, 아버지를 따라 의사를 하는 것은 뭔가 재미있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저한테 더 잘 맞는 의대 전형이 있었고, 우연히 입결이 더 좋은 쪽으로 지원해서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과대학을 가던 시절에 드라마 허준이 유행해서 한의대가 유행이었고, 의대 못지않은 경쟁률이 있었으니 그때 비슷한 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다른 길을 갔으면 어땠을지 가끔 생각해 봅니다.
어쨌든 어떤 길을 선택해서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의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으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의사다워집니다. 의사다워진다는 것이 좋고 나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의사는 의사처럼 굴고, 유치원 선생님은 유치원 선생님처럼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업인으로서 지내고 받은 교육과 방식에 따라서 단순히 명찰이 아니라 태도나 생활 방식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부디 신중히 고민하고 충분히 알아보고 선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고민과 경험을 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책처럼 간접 경험을 할만한 기회들을 잘 활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직업은 다리가 세 개인 화로에서 세 가지 다리가 균형 있게 맞춰진 상태입니다.
한 개의 다리는 나는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악한 행동이라면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회와 누군가에게 보탬이 된다는 자기 암시가 없으면 긴 시간을 안정적으로 보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보수가 적고 일이 힘들더라도 국경 없는 의사회 활동과 같은 의미 있는 행동에 가치부여를 한다면 만족도가 높겠지만 도굴꾼은 사회적인 손해를 미치는 일이니 돈을 벌더라도 좋은 직업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두 번째 다리는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저는 줄기세포의 분화도로 설명을 합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란이 되면 한 개의 세포에 분열해서 온갖 종류의 세포로 분화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세포가 가능했는데 점차 분화를 거듭할수록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줄어듭니다. 직업도 다양한 선택이 길이 있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가능했는데, 선택을 거듭할수록 선택의 폭이 줄어듭니다. 한 가지로 정의된 직업은 위기 상황에 대응하거나 자신의 성향과 특정 직업이 맞지 않는다면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타 직업을 예로 들어 죄송하지만, 교대 진학 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은 진로가 결정된 전통의 안정된 직업입니다. 그러나 교대를 가보니 생각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깨달았다면, 교대 졸업증은 크게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또 시대가 변하여 학생들이 줄어들었습니다. 임용을 받고도 원하는 지역에 배치되지 못하거나 취직을 하지 못하는 선생님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임용고시를 통과하고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다양성이 없으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는 나는 이 일을 하는 대가로 무엇을 얻는가 하는 기준입니다. 약간의 밑밥을 깔고 시작해 보겠습니다.
사실 사람이 의미와 자기만족으로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직업 선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시선이 좋지 않거나, 위험하거나, 보수가 적은 일은 좋은 직업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그 사람을 둘러싸고 지지하는 가족들에게도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면을 부정하고 오롯이 개인의 신념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개인으로서 좋은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좋은 직업인이긴 어렵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찰스 다윈은 진화론을 기술한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생 금전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평생 걱정 없이 배를 타고 관찰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부분의 인생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벌어온 수입으로 가족들 생활도 해야 하고 여유가 된다면 여행도 가고 싶고, 좋은 옷도 입고 싶습니다.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위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업에는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 다리를 종합하면 내가 직업으로 행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다양한 형태의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분화도가 높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 하겠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초등학교 선생님은 교육이라는 숭고한 행위를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업 안정성도 좋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출생 고령화 사회에서는 계속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도굴꾼은 도둑질을 해도 되고, 은행털이를 해도 되고, 보이스피싱을 해도 되는 분화도도 좋고, 아마도 높은 수입을 벌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만족도나 사회적인 필요성은 매우 낮습니다.
그린피스에서 일하는 NGO 직원은 옳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고, 개인의 신념에 따라 해양 오염을 막는데 종사하거나, 전쟁지역에서 반전 행위를 한다거나 하는 다양한 활동을 할 거라는 분화도도 높습니다. 다만, 직업적인 보수가 높거나 풍요로운 생활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의사는 어떨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의사라는 직업을 선호하는 데는 이러한 요소들이 균형 있게 작용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생명과 직결된 바이탈과 의사로서 저는 제가 하는 행위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적기에 진단하고 치료 방향에 도움을 드린 환자분들이 잘 치료받아서 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 분화도 면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흔히 임상의사라고 말하는 환자를 보는 의사, 그중에서도 내과의사, 수술하는 외과의사, 미용을 전문으로 하는 피부과, 성형외과 의사,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진단에 도움을 주는 영상의학과나 병리과 의사도 있습니다. 분야를 달리해서 임상 연구를 주로 하는 의사, 기초 과학이나 약물 개발하는 대학이나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의료사고 전문 변호사, 의학전문기자, 보건의료 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공무원 의사, 세계 곳곳 의료취약지에서 활동하는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도 있습니다. 비교적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세 번째 자본주의의 기준에서 의사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현직 의사로서 좀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카테고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고, 비교적 명확한 것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금전적인 보상이 큰 쪽으로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할 때 기본적인 소득은 보장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직업 안정성이 중요하다면 국군 수도병원에 지원하여 육군 장교에 준하는 급여를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리해 본 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직업의 기준에는 기본적으로 부합합니다.
하지만 심각한 단점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뒷 장에 설명할 내용으로 한 사람의 의사가 되기까지 과정이 너무 길고 지난합니다. 입시에 필요한 시간은 빼더라도 과정만 십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회비용으로 생각하면 단기간 높은 수입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무거운 책임감입니다. 모든 의사가 임상의사인 것은 아니라 일반론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순간의 선택으로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 또는 질병의 악화와 같은 중대한 기로에서 의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적기에 적절한 검사로 발견하고 설명하는 것은 매일 하는 일인데도 부담감이 큽니다. 또 예상치 못하는 사고나 변화도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저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소송의 위험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의료소송은 일반인이 이기기 힘든(?) 소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환자에게 의료 과정에서 피해가 있었다면 무척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료인이 일부러 사고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적절한 주의 의무를 다 했는데도 확률적으로 발생한 일이라면 소송에서 이기고 지고를 떠나 송사에 휘말리는 것 자체로 매우 고난한 일이 됩니다. 소명감 하나로 어려운 분야를 선택한 흉부외과(심장), 외상, 소아응급, 중환자 선생님들이 소송에 지쳐 현장을 떠나는 일,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후학이 양성되지 않는 환경은 아쉬움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고 판사와 같은 명예직, 권력이 중요하다면 정치인,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과학자나 예술가 등등 다양한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 있습니다. 직업 선택도 일종의 시간과 노력 투자겠네요. 투자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