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사명감 없이 가볍게 시작한 글입니다. 의사의 자녀였고, 인생의 절반을 의사로 살고, 의사인 배우자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의사로서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갈망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새삼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의정사태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사회의 미움을 이렇게 한꺼번에 받아본 적이 있나 싶습니다. 일선에 있던 개인 의사로서는 나름의 최선으로 살고 있는데 나한테, 우리한테 왜 이러지 하는 우울감이 상당히 의사사회를 지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치동 학원가에는 초등의대입시를 표방하는 학원에 불이 꺼지지 않고, 주말에도 차가 막혀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학업열이 높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학원가에서 인생을 보내고, 마치 의과대학 입학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수험생들에게 이 길이 이렇다. 어렵다. 그래도 하고 싶은지 알고 결정해라. 그래야 막상 의대입시에 실패해도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고, 의대입시에 성공해도 인생이 성공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경쟁이 심하다 보니 똑똑한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입학하기 전에는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막상 들어오니 책 한번 읽으면 머릿속에 그림처럼 저장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매일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나보다 좋은 동기들도 있습니다. 이들과 경쟁하면서 좌절하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니 졸업도 하고 전문의도 되었습니다. 늘 1등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과대학에서 배웁니다. 그때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뿌리는 있어야 합니다.
또 의사로서는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고민했을 때 의사들이 느끼는 이 허탈감은 의사에 대한 공격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랜 기간 성실히 공부하고 일하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를 미워할까, 나를 공격할까라는 이 생각을 넘어서기가 힘들었습니다. 모든 의사가 성실하거나 모든 의사가 도덕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사는 그 과정을 잘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변명이 필요해서 글을 썼습니다. 오랜 기간 고민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그리고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을 응원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느낀 점은 내가 이 일을 아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내고 겪었던 일들도 떠오르고 내가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분화도 낮은 시절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습니다. 고충에 대해서도 속으로 생각할 때보다 글로 끄집어내니까 수면 밑으로 애써 감춰왔던 감정이 올라옵니다. 어려웠던 환자, 왜 그렇게 나를 괴롭혔을까 하는 환자, 별일 아닌 일로 괴롭히던 선배-교수들도 지나쳐갑니다. 지금도 환자 보는 일이 어렵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환자가 오고 다짜고짜 큰소리를 내는 분부터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났을지도 모르는 환자도 매일 경험하고 퇴근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아마 앞으로도 오랜 기간 이 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후배 의사가 될 분들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