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를 놓치면 회사 생활을 놓칠 것만 같았다.
"저녁먹자."
5시 55분 쯤 사장님의 메신저가 도착했다.
"네."라고 쓰기도 전에 이미 옷을 챙겨입고 문을 나서고 있는 사장님이 보인다.
부랴부라 컴퓨터를 끄고 뒤 따라 나갔다.
회식과 그냥 술자리의 차이점은 법카를 쓰느냐 아니냐의 차이였지, 퇴근 후 크고 작은 술자리는 매일 있었다. 사장님이 부르면 사장님과, 팀장님이 부르면 팀장님과, 직원들이 부르면 직원들과 매일 술을 마셨다. 5년 차 쯤 지나서는 프로 거절러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거절'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강요가 아니었는데도, 그 술자리를 놓치면 회사 생활을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특히나 이직 후 초반은 불러주는 곳은 모두 열심히 다녔다.
우호적인 관계를 쌓는 것은 실제로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회사에서 까칠하게 느껴지던 사람들도 몇 잔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따뜻한 동료 그 자체였다. 그렇게 두루두루 자리를 함께하며 나라는 사람이 꽤 서글서글하고 대화가 통하며 유쾌한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나니, 회사 다니는 것이 즐거워졌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몇 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회사에 내 근간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회사는 일하러 다니는 곳이지 친구 사귀러 다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 진리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정서적인 교감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룹 안에서는 교과서 안의 꿈같은 소리일 뿐이다.
우리 회사처럼.
사장님은 퇴근 후 직원들과 술자리를 즐긴다.
"진수는 어디갔냐? 왜 안 오냐?"
"진수 주임, 오늘 운동가는 날이라서 못 왔습니다."
"쯧. 영업하는 놈이 퇴근 후 운동을 다녀?"
진수는 대리점 영업을 하는 영업사원이었다. 사장님은 영업사원이 퇴근 후 거래처를 만나서 영업을 해야지 운동을 다닐 시간이 어딨냐고 정신상태가 글러먹었다며 혀를 찼다. 거래처 약속이 없으니까 운동을 갔겠지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 뱉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사장님은 진수가 운동을 가서가 아니라, 술 자리 부름에 응하지 않아 화가 난 것 같았다.
"oo 회사(굴지의 대기업) 회장은 예전에 고가평가를 자기랑 밥 같이 많이 먹은 순서대로 했대. 회장이랑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회사의 주요 사업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니, 일리있는 평가 기준인 거지."
회사의 주요 사업을 왜 밥을 먹으며 일부 한정된 직원들과 논의하는 걸까. 관련 부서 사람들과 적절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역시 내 뱉지 않았다.
사장님과의 술자리에서 다른 직원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원들 이야기 뿐 아니라 이미 그만둔 직원들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개인사에 대해 알게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옛날 직원들 이름과 에피소드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 지, 나중에는 아는 사람같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내가 나중에 그만두게 되면 사장님 머리 속에 내 이름이 지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자리는 길어지고 나는 늘 만취했다.
어느 날은 택시에 가방을 두고 내리고, 어느 날은 휴대폰을 잃어버리기도 하였다. 블랙아웃은 다반사였다.
5년차가 지나고 나서 더 이상 사장님과 퇴근 후 술 자리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를 닮아간다.
그 때 즈음부터 동료들과의 술자리도 되도록 피했다.
술 자리에서 내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술자리에서 듣기보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연차가 쌓일 수록 술자리를 피하고 말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모진 경험을 하고 나서야 이해했다.
퇴근 후 등산을 시작했다. 이직하고 나서 꾸준히도 누적해온 살을 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등산하는 내내 하루를 복기했다.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했던 말들과 상황을 곱씹었다. 매일 후회해도 다음 날 후회할 일은 또 생겼다.
회사는 일하러 다니는 곳이지 친구 사귀러 다니는 곳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이면서도 내게 판타지이었지만, 연차가 쌓인 팀장의 위치에서는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사실 진작부터 가능했었는데, 내가 상황에 만족하고 심취하느라 재검토 하지 않았던 진리였다.
이 곳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그것이 기적이자 천운이다. 앞으로 관계에 힘쓰지 말고 일 그 자체를 하러 다니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정하지만 선이 분명한 온오프가 있는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여전히 우리회사의 많은 주요 사항들이 술자리에서 결정된다. 신사업검토, 방향성, 인사까지도.
그 자리에 초대 되지 않았거나, 초대되었으나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그 위치가 관계자나 팀장이라고 하더라도 의사결정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술자리에 있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모든 것은 형태가 다른 통보이고 이미 사장님 마음 속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그 결정에 이름이 들어간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저 동의 서명서와 같은 역할로 쓰임 당한 것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작가 류시화 님 시 제목이 떠오른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백 번 글로 읽어도, 남이 천 번을 말해줘도, 스스로 겪고 깨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 퇴근 후 술자리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