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의미를 위협하는 AI.
[바둑은 스포츠인가 예술인가]
체스와 오목과 달리 바둑은 AI가 절대 프로기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그 이유를 물어봤을 때, 바둑에는 기풍이 있기 때문이라고 많은 프로기사들이 답했다. 그러나 기풍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바둑을 둘 때 바둑판만 보면, 누구와 누가 뒀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둑을 두는 스타일에 그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가 들어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바둑은 결국 승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 스포츠가 아닐까? 생각했다. 근데 또 예술로 분류되는 콩쿠르는 순위를 매긴다고.. 어쨌든 난 여전히 그건 예외라고 생각하고 스포츠로 분류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AI가 탁월성 측면에서 인간을 이길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인간이 AI보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장강명 작가는 소설가다. 장강명 소설을 정말 좋아한다. 표백, 댓글부대, 한국이싫어서, 재수사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너무! 근데, 만약 AI가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가들보다 더 소설을 잘쓴다면,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있는 소설을 AI에게 학습시키고 더 문학적인 소설, 작품성 있는 소설을 만들어내라고 했을 때, 더 탁월하다면, 소설가들은 소설을 멈춰야 할까?
아직 챗gpt나 제미나이 등 AI는 알파고가 바둑계를 위협한 것만큼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에게 탁월함을 빼앗길 것이고(실제로 1년 전의 챗gpt와 지금의 챗gpt 수준은 엄청 다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미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책 제목도 <먼저 온 미래> 아닌가. 아직 아니라는 말로 미뤄선 안되고 정말 고민해야할 일이다. 바둑이든 소설이든 인간은 절대 AI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AI와 달리 인간만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어떤 가치일까. 알파고가 등장하고 나서 중국 바둑프로기사 중에서는 승부 외에 다른 것에 더 집중하는 자들이 생겼다. SNS 활동이나 어그로(?)로 팬들에게 더 친근함과 인기를 얻음으로써 AI가 할 수 없는 인간성을 내세운 것이다. 작가는 유사한 예로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나온 휴대폰 외판원 참가자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든다. 외판원 참가자는 전문 성악가보다 탁월하지 않지만, 시청자들은 그에게 환호한다. 우리는 그 이유가 뭔지 명확하고 완벽한 인간의 단어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떤 건지 느낌으로 알고 있다.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져도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진다는 걸 알면서 다시보기해도 또 감동을 받는다. (근데 이 경우는 결국 ‘승리(탁월)’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에 감동적인 거긴 함)
[재미와 의미라는 가치자체를 바꾼다]
인간이 AI와 상관없이 계속 바둑, 작곡, 소설...을 하는 이유를 찾아야할 때, 그에 대한 가장 만만한(?) 답,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재미’다. 재미있으면 계속 해야지.. 근데 AI가 멜론 top100 안에 들만한 음악을 하루에 몇백개씩 내놓고, 베스트셀러 100 안에 들만한 소설을 하루에 몇백개씩 내놓아도 재미있을까. 쏟아져 나오는 음악과 문학에 인간은 매번 감동받을 수 있을까? 감동에 내성이 생기지 않을까. 그럼 재미를 이유로 계속했던 행위가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나온 이야기 중에 죄수에게 주는 형벌 중에 가장 무거운 게 인간에게 무의미한 짓을 시키는 거라고.. 흥미로웠다.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다시 메꾸라고 한다. 흙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고 다시 원위치 시킨다고 한다. 인간은 무의미한 것을 못 참는 존재 같다. AI가 인간의 의미를 위협하고 있는 것 같다.
[의미 있는 삶, 고통 있는 삶]
우리는 기술이 도구일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과학기술은 이념만큼이나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방식 전부를 바꿔놓는다. 자동차는 이동의 편리함을 제공했고 (동시에 가족들을 멀리 떨어뜨려놨고), 핸드폰은 외롭지 않게 수만 명과 소통할 수 있고 (동시에 수십개씩 남발하는 카톡 하나하나 그 무게가 가벼워졌고), 결정사앱이나 데이트앱은 상대가 나와 몇 퍼센트로 잘 연결될 확률인지 예측 가능해서 미리 회피할 수 있다 (동시에 적절한 사람과 적당한 사랑을 한다) . 불확실성과 불안은 인간에게 필요 없는 가치일까? 위와 같은 기술은 인간이 겪지 않을 고통을 감해주는 좋은 도구일 뿐일까. 조지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나오는 문장이다.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통 없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일까. 남편과 영화관에서 <만약에 우리>를 보고나서 한 대화가 떠올랐다. 슬픈 감정, 안타까운 마음, 아련한 마음... 이런 것들을 느껴서 좋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저 여자애는 현실적으로 ‘저 돈 많은 선배’를 골라야 편하게 살아갈 텐데... 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만약 정원(문가영 분)이 그 선배를 골랐다면, 그녀의 인생은 더 아름다웠을까? 그런 삶만 선택하는 사람이 <만약에 우리>를 보고 슬프고, 안타깝고, 아련함을 느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