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를 위한 찬사
<피아노>, <발리에서 생긴일>, <미안하다사랑한다>, <올인> … 옛날 드라마는 제목만 들어도 그 드라마의 OST와 장면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아련해진다. 생각하기만 해도 순식간에 그 분위기에 나를 데리고 간다. 그런 드라마는 어느새 없다. 아니 없는 건지 또는 훌륭한 걸작이 계속 나옴에도 성인이 된 내가 이미 냉소주의가 된 탓인지, 그 시절이 그리운 내가 그 때의 드라마마저 미화해버린 것인지.
30대의 연애가 20대의 연애와 다르고, 40대의 연애가 30대의 연애와 다른 것처럼, 사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심장이 뛰는 파동의 폭이 줄어드는 게 숙명이다. 그러던 중 경기도에 사는 직장동기가 나에게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추천했다. 경기도민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면서. 서울에 살고 있는 내가 공감할 수 있을까?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요약한 영상의 썸네일에는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까지. 역시 요즘 드라마는 나랑 안 맞아.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해방일지>는 나와 상관없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할 일 없는 주말, <나의 해방일지> 1화를 시작했다. 발랄하거나, 당당하거나, 청순하거나, 개성 있거나. 그런 여자들이나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듯 ‘색도 없고 온도도 없어 보이는 염미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 게 대부분 인간의 삶인데,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목숨 거는 사랑을 보고 싶어하는 건데. 여태 내가 생각했던 드라마를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직까지 통하는 이유는 결국 ‘대리만족’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인데. <나의 해방일지>에는 대리만족을 느낄 만한 상황이 없다. 어쩌면 끝까지 없다. 그냥 ‘나 같은 사람’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가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을 그녀의 입으로 똑같이 말해준다. 정확히 말하면, 내 안에서 정리되지 않고 떠다니는 생각들을 그녀가 내레이션과 대사로 정리해준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 있게 ‘좋아하는 드라마 뭐야?’에 답할 수 있는 드라마가 생겼다.
나만 그런 것 같았다. 친구들도, 직장동료들도, 다들 대화하는 게 거침없고 거절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사람들 속에 섞여 별 고민 없이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데. 별난 생각은 나만 하는 것 같았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에겐 모든 게 쉬워 보였다.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나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 속에서 대화하는 것마저 ‘노동’처럼 느끼는 것도, 집 밖의 생활은 집 안의 삶을 위한 것뿐이라는 것도. <나의 해방일지>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특히 내향인들을 위로하는 드라마라며 추앙 받는 것을 보며, 또 위로받는다. 나만 그런 거 아니네. 일반적인 드라마라면 주인공이 목표(해방)를 이뤄낸 결말에서야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끝보다 중간이 좋고, 중간보다 처음이 좋다. 나를 훔쳐보고 만든 것 아닌가 하는 ‘그저 그런 삶을 살며 계속 무언가를 갈구하는 게’ 사실 해방에 닿고 마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네 인생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