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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괜찮다고 말해도 될 나이

행복을 연습하며 살아온 시간에 대하여

by 정성균

프롤로그. 도서관의 빈 의자


부족한 것 하나 없는데, 왜 가슴 한구석은 이토록 썰렁할까. 평생을 갈망하던 쉼을 손에 쥐었을 때, 마음은 뜻밖에도 등을 돌리지 못한 불안을 데리고 있었다. 그 낯선 느낌이 예고 없이 들이닥친 곳은 도심 외곽의 어느 도서관 열람실이었다.


주말 오전의 도서관은 평일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침묵을 품고 있었다. 공간을 채운 그 고요함은 사람 수와 무관했다. 그곳에 머무는 이들이 뿜어내는 태도에서 비롯된 무게였다. 그들은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으며 오래 버티겠다는 말 없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두꺼운 외투는 등받이에 가지런히 걸렸고, 가방은 발밑 어둠 속에 놓였다. 책상 위 투명한 물병 하나만이 꼿꼿하게 자리를 지켰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느슨한 각오가, 공간 전체를 천천히 조이고 있었다.


천장까지 솟은 책장 사이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고, 창밖에서 비스듬히 꽂히는 늦가을 햇살은 긴 책상 위에 나른하게 엎드렸다. 누군가는 노트에 문장을 부지런히 옮겨 적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따금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나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무거운 정적을 예리하게 베고 지나갔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꽉 찬 공기였다.


책장 사이를 서성이다 빈자리를 하나 발견하고 걸음을 유보했다. 그러나 의자를 당겨 앉지는 못했다. 의자는 말없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앉을 이유만 내 안에 없었다. 옆자리의 사람이 짐을 챙겨 일어났고, 그 빈자리는 곧이어 들어온 다른 이에 의해 채워졌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며 자신의 자리를 찾는데, 나만 홀로 통로 한가운데 갈 곳 없이 떠도는 먼지처럼 서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는 평화였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행복이라 부른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시간, 지식으로 가슴이 차오를 조건은 이미 충분했다. 그럼에도 이상한 일이다. 완벽해 보이는 조건 앞에서 마음은 밑 빠진 독처럼 공허한 울림만 가득했다. 무엇을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을 허기가 가슴을 긁어댔다. 타인의 빈자리보다 더 깊은 고독은, 나 자신과 마주 앉은 시간이 낯설 때 찾아온다.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갈비뼈 사이사이로 시린 바람인 양 주인 행세를 하며 들어앉았다. 눈앞의 글자는 수천 년을 견뎌온 옛 철학자의 맑고 뚜렷한 생각을 보여주었지만, 그 뜻은 가슴 깊이 스며들지 못하고 겉에서 미끄러졌다. 감정은 문장 곁을 맴돌다 연기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애썼다. 조명이 지나치게 밝거나, 의자가 낡았거나, 혹시 실내 공기가 메마른 탓은 아닐까. 그러나 모든 사물은 제 위치에서 제 몫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문제의 뿌리는 사물을 지나, 곧장 나에게 닿아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배부른 느낌이 든다는 사실은 본능에 속한다. 반면 장엄한 풍경 앞에서 감탄해야 한다는 사실은 배움의 영역이다.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 속에 홀로 앉아 있는 법은, 나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읽던 책을 덮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적막을 견디는 기술,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훈련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책장 사이를 걷다 문득 한 단어가 머릿속에 박혔다. 이것은 운에 맡길 일이 아닌 철저한 훈련의 과제다.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무수한 인내 끝에 무대에 서듯, 나 역시 행복이라는 곡을 연주할 악보조차 읽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직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법을 먼저 익혀야 했다.


1부.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


나는 아직 사회의 톱니바퀴 속에서 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긴 탁자가 놓인 회의실에 앉으며, 때로는 외로운 결정을 내린다. 다만 젊은 날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던 습관은 버렸다. 애써 속도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속도를 늦췄다고 해서 어깨를 누르는 무거움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속도가 줄어든 탓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더 또렷하게 눈을 찌르곤 한다. 숨 가쁜 속도가 물러간 자리에, 비로소 선명한 풍경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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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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