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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신 덕분에, 이 해를 무사히 놓아줍니다

by 정성균

당신이라는 목격자에게 띄우는 편지


한 해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말은 안도에 가깝지만, 우리가 통과한 그 시간이 결코 가벼웠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 글은 매일 쓰고, 걷고, 읽으며 생의 무게를 견뎌온 한 중년의 기록입니다. 저는 두 가지 속도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브런치라는 캔버스는 저에게 깊은 호흡을 요구했습니다. 흩어진 생각을 모아 논리의 집을 짓고, 문장의 주춧돌을 놓으며 제 내면의 사유를 견고하게 다듬는 시간이었습니다. 반면 스레드(Threads)라는 광장은 가벼운 발걸음과 같았습니다. 스쳐 가는 영감이 휘발되기 전에 재빨리 포착하고, 동시대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감각을 나누는 창구가 되어주었지요. 브런치가 저를 깊게 만들었다면, 스레드는 저를 넓게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속도의 글쓰기는 삶을 분절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이 마침내 ‘의미’가 된 것은, 화면 너머 당신의 시선이 머물렀던 덕분입니다. 쓰는 일은 고독한 독백이었으나, 읽히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우리의 대화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읽어주셨기에 저는 이 무거웠던 해를, 가장 가볍고 안전하게 놓아줄 준비를 마쳤습니다.


말하지 않음의 깊이와 써 내려감의 무게


십이월의 벽걸이 달력은 물리적으로 얇아졌으나, 심리적 부피는 극대화됩니다. 마지막 한 장 남은 종이를 응시할 때 느껴지는 압박감은 날짜가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제때 발화되지 못한 언어들이 내면에 침전물처럼 쌓여 묵직한 무게를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일 년간의 기록 노동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 같은 내면의 소란도 텍스트로 치환하면 비로소 질서가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긴 호흡의 글이 제 안의 심연을 응시하게 했다면, 짧은 호흡의 메모는 번득이는 영감을 붙잡아주었습니다. 업무는 기계적으로 마감되었고 사회적 교류는 예의라는 완충재로 봉합되었으나, 기록되지 않은 감정은 여전히 갈 곳을 잃고 떠다녔으니까요.


그 무질서를 정돈한 힘은 여행이나 일탈 같은 외부의 자극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책상 앞에서의 정적인 고투와, 그 결과물을 읽어주신 독자님들의 공감만이 저를 정화해 주었습니다. 삶은 군더더기를 소거할 때 본질이 드러납니다. 달력이 얇아질수록 우리는 도리어 입을 닫고 가장 정확한 어휘를 고르게 됩니다. 이것은 중장년이 시간을 대하는 가장 정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쓴다는 행위는 저를 과시하기보다 스스로를 객관화하기 위한 치열한 거리 두기에 가까웠습니다.


육체가 증명하는 정직한 리듬


생각이 정체될 때면 저는 운동화 끈을 조여 맵니다. 매일 저녁, 일만 보의 궤적을 남기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 것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몸의 감각을 조율하는 저만의 의식(Ritual)이 됩니다. 발바닥이 지면과 마찰할 때 전해오는 진동, 종아리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박자. 그 물리적 리듬 속에서 머릿속의 추상적인 불안은 구체적인 감각으로 희석됩니다.


걷기가 대지 위에 발로 쓰는 산문이라면, 로드사이클은 바람을 가르며 쓰는 시(詩)입니다. 주말이면 헬멧을 쓰고 안장에 오릅니다. 얇은 타이어가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만이 존재하는 시공간이지요. 오르막에서 호흡이 한계치에 다다를 때, 터질 듯한 심장 박동은 생존의 신호음이 됩니다.


젊은 날의 시간은 두뇌로 연산하는 개념이었으나, 지금의 시간은 관절의 마디와 근육의 뻐근함으로 당도합니다. 육체는 위선을 모릅니다. 요행 없이 제가 밟은 거리만큼만 이동한다는 명징한 인과율. 저는 속도를 높이는 대신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는 지구력을 배웁니다. 이 정직한 반복이 삶을 지탱하는 근육이 됩니다. 땀방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저는 지난 계절을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습니다.


찻잔 속에 담긴 관계의 투명함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한때 이 금주(禁酒)가 관계의 확장을 저해한다고 여겼던 적도 있습니다. 취기가 제공하는 무장 해제 없이는 타인과 섞이기 힘들 것이라 오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하고, 걷고, 침잠하며 관계의 본질을 재정의하게 되었습니다. 흐릿한 정신으로 맺은 유대는 안개처럼 흩어지기 마련이니까요.


가장 견고한 인연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타인들이었습니다. 지난주, 오랜 지인과 마주 앉았습니다. 소란스러운 주점을 피해 골목 안쪽의 정갈한 찻집을 택했지요. 보이차 한 주전자를 중앙에 두고 우리는 침묵을 공유했습니다. 찻물이 끓는 비등 소리, 찻잔을 내려놓을 때의 청아한 파열음이 언어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맨 정신으로 타인의 눈동자를 직시하는 일은 투명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투명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심연을 관찰합니다. 과장된 제스처나 지키지 못할 약속을 덜어내고, 차 한 모금의 온기를 나눕니다. 취기에 의존하지 않는 명료한 관계. 이것이야말로 중장년이 도달할 수 있는 관계의 최상위 밀도가 아닐까요. 당신과 저 사이에도 술이나 과장된 수사는 필요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맑은 눈빛 하나면 충분합니다.


도서관, 침묵으로 건축된 거울


주말 오후, 자전거에서 내려 호흡을 고른 뒤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고 그 경계를 통과하는 때, 도시의 소음은 등 뒤에서 완벽하게 절단됩니다. 공기의 성분이 달라지는 지점이지요. 건조한 종이 냄새와 정적인 분위기가 전신을 감쌉니다. 이곳은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 은닉된 저만의 성역(聖域)입니다.


서가 사이를 거니는 행위는 책을 고르는 일에 그치지 않고, 대화할 상대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브런치와 스레드에서 동시대인들의 글을 읽으며 수평적인 연대를 확인했다면, 도서관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현자들의 텍스트를 통해 수직적인 깊이를 구합니다. 활자 사이에서 발견한 문장 하나가, 며칠간 내면을 잠식하던 고독을 단숨에 해체하기도 합니다.


창가에 앉아 책을 펼치면, 오후의 햇살이 페이지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습니다. 사각거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청취되지 않는 몰입. 그 적막 속에서 타인의 문장을 거울삼아 저를 비춰봅니다. 독서는 지식을 쌓는 일이라기보다, 헝클어진 마음의 결을 빗어내는 정화 작업이 됩니다. 이 정화의 시간이 있었기에, 저는 앙금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중단되지 않는 문장으로서의 내일


이 기록은 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시간을 관리하고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관찰을 지향합니다. 문장은 과장되지 않고, 태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정리하기보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의 언어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습관처럼 비장한 갱생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매일 쓰고, 걷고, 읽으며 삶을 아카이빙(Archiving)해온 사람에게 새해는 극적인 반전의 무대가 아닙니다. 어제의 문장이 오늘로 이어지고, 내일로 확장되는 연속선상에 있을 뿐이지요. 인생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절반 이상 집필되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서두라기보다, 지금까지 써 내려온 문맥의 호흡을 유지하는 일일 테니까요.


저는 마침표를 찍으려 서두르지 않습니다. 대신 쉼표를 적절히 배치하며 숨을 고릅니다. 무리하게 서사를 확장하려다 비문을 만들지 않도록, 걷기로 몸의 평형을 잡고 독서로 정신의 균형을 맞춥니다.


이 글을 지나온 뒤에도 당신에게 얄팍한 위로보다 단단한 신뢰가 남기를 바랍니다. 거창한 결심보다, 내일도 묵묵히 지속할 수 있다는 감각이 마음에 놓이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은 한 해의 끝에서 건네는 작별 인사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을 조용히 이어가는 방식에 대한 제안입니다. 읽어주신 덕분에, 저는 이 해를 무사히, 그리고 충만하게 놓아줍니다. 펜을 놓지 않는 한,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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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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