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이전의 대화

by 정성균

추위가 깊은 자리를 향해 차오릅니다. 한 계절의 가장 뾰족한 끝이 문턱을 넘어와 발치에 고입니다. 가장 추운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단단히 얼어붙어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집무실의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찬 기운은 두꺼운 유리에 가로막혀 있으나 눈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아릿해집니다. 창 너머 세상은 차갑게 식은 공기가 켜켜이 쌓인 채 고요히 가라앉아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는 일상은 참으로 낯섭니다. 찬바람을 피해 옷깃을 바짝 세우고 길을 서둘러 오가는 사람들. 저 멀리 발아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품은 작은 점들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말과 소음은 이 높이까지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힘없이 흩어져 버립니다.


저들은 입가에 어떤 문장을 매달고 누구의 가슴에 심어주려 가는 것일까요. 저 역시 그들 사이에서 숱하게 웃고 떠들었으나 돌아서면 늘 혼자라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습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봅니다. 하얗게 번지는 뿌연 막 위로, 그동안 쏟아내고 또 잃어버렸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찻잔 위로 번지는 정직한 소식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에게 먼저 도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리보다 빠르고 그 어떤 꾸밈보다 참된 것들입니다.


찻잔을 쥔 상대의 손을 본 적이 있습니까. 분명 단단히 잡고 있는 듯하나 손가락 끝이 매끄러운 겉면 위에서 아주 작게 떨릴 때가 있습니다. 찻물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살아 있는 가슴의 울림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듯한 떨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마음이 입을 열기 전에 내미는 손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입으로는 괜찮다 말하지만, 손끝은 차마 숨기지 못한 참된 동요를 툭툭 건드리고 있습니다. 번드르르한 말보다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드는 건, 단어 하나를 고를 때 입가를 달싹이며 머뭇거리는 그 짧은 고요입니다.


사실 예전의 저는 대화의 빈틈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잠깐의 정적조차 사이가 멀어지는 신호처럼 느껴져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무 뜻 없는 농담으로 허공을 서둘러 채웠습니다. 속마음이 들킬까 봐 세운 울타리였죠. 사실 저는 타인의 슬픔을 함께 견디기보다 그 어색함을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비겁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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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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