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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상

16. 내 가슴에도 봄바람이

by 큰나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가슴을 스치지만, 희뿌연 하늘 속에 뒤섞인 미세먼지가 창밖을 답답하게 가린다. 아직 아물지 않은 곳 때문에 걷기가 불편하지만, 방 안에만 머물기엔 봄이 아깝다.


마침내 등산화를 신고 등산복을 차려입고 모자를 눌러쓰니, 오랜만에 거울 속에서 옛날의 내가 보인다. 손에 등산 스틱까지 쥐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금방이라도 연주대나 백운봉을 향해 힘차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누구인가! 서울 근교는 물론 지방의 이름난 산들을 혼자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다니던 내가 아닌가.


하지만 기분도 잠시, 등산로에 들어서자마자 거칠어진 숨소리와 좁아진 보폭이 현실을 일깨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으며 조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남산타워와 L타워가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하다. 그러나 심한 미세먼지 탓에 희미하게만 감돈다.


더 높이 오르기보다는 둘레길로 접어들어 사박사박 걸어가니, 진분홍 진달래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고, 어느새 일찍 핀 꽃들은 아기 손을 펼치듯 환하게 웃고 있다. 그 곁에는 노란 산수유처럼 피어난 생강나무꽃이 좁쌀을 모아 놓은 듯 소담스럽게 움트고 있다.


창밖으로 스쳐보던 봄을, 이제는 직접 걸으며 내 눈 속에 한 장 한 장 저장해 본다. 불편함도 잊은 채 홀로 봄을 누리는 이 시간이 새롭고 반갑다. 맑은 하늘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그래도 이번 주말엔 더 많은 꽃송이를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보다는 더 가볍게, 더 멀리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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