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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자 Nov 11. 2024

멸 종

가볍게 써 본 단편선.


사십 대 중반의 노총각이 소파에 반쯤 기대어 텅 빈 눈으로 티브이 화면을 바라본다. 한 손에는 이미 몇 조각 남지 않은 치킨 박스가 흔들리고, 다른 손에는 반쯤 마시다 만 맥주캔이 힘없이 들려 있다. 집안 어디에도 다른 사람의 흔적은 없고, 그저 치킨 기름 묻은 휴지와 리모컨이 외롭게 그의 곁을 지킬 뿐이다.

티브이 속에서는 예능 방송이 한창이다. 출연자들은 즐겁게 퀴즈를 맞히며 웃고 떠들고, 방청석은 연신 웃음소리에 휩싸인다. 남자는 마치 그 웃음에 도전하듯 치킨을 한 입 베어 물고 무심히 화면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가 "켁켁!" 거리기 시작한다. 뭐지? 잘못 삼켰나? 하며 손가락으로 목을 만지작거리지만, 점점 더 숨이 막혀오고 고통은 심해진다.


심장이 쿵쾅대고 숨이 턱턱 막히자, 그는 급히 옆에 있던 맥주캔을 입에 가져가 그대로 들이부어 보지만, 맥주는 목구멍으로 내려가기는커녕 입안에서 새어 나와 턱과 셔츠에 줄줄 흘러내린다. 미끄덩거리는 손으로 맥주캔을 내려놓다가 맥주가 소파 위로 엎어지고, 남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잊은 채 생각한다.


'그냥 피자시키고 싶더라. 아 소파.. 청소... 짜증 나'


잠시 사이 순식간에 급박해진다. 얼굴은 벌겋게 변하고, 그는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손을 뻗는다. 손가락을 화면에 올려 지문 인식을 시도하지만, 손에 묻은 치킨 기름 때문에 지문 인식이 번번이 실패한다. 심장이 더 크게 울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다. 가까스로 패턴을 입력해 보지만, 미끄러운 기름 덕분에 연속해서 잘못 입력한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 옴을 깨닫자 순간 자신에게 실소를 날린다.


'아 ㅅㅂ... 컴퓨터에 동영상. 삭제해야 하는데.'


그 순간, 티브이 속 예능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진다. “자, 오늘의 생존왕은 누구일까요?!”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패턴 잠금을 겨우 열고 119를 누르다가 그대로 소파 위로 푹 쓰러진다. 두 눈을 부릅뜬 채, 티브이 화면을 향해 숨을 거둔다.




그의 시야는 곧 어둠에 잠기고, 기이하게 빨려 들어가듯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마치 그의 육체가 아닌, 그의 유전자 자체가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DNA가 눈앞에 거대한 실타래처럼 펼쳐지고, 유전자의 모든 조각들이 하나둘씩 풀려 과거로 흘러가듯 보이기 시작한다.

장면은 급격히 전환되고, 남자의 조상들이 연이어 스쳐 지나간다. 수천 년 전 얼음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구석기시대의 조상, 동물과 싸우며 거친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모습이 보인다. 그가 험난하게 사냥을 성공하던 장면도, 온갖 위험을 피해 도망치던 순간도 지나간다. 또다시 장면이 바뀌고, 이번엔 중세시대 그의 조상이 검을 들고 필사적으로 싸운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긴 그 장면 속에서도, 그는 머릿속으로 속삭인다.


'끊임없이 살아남아 세대를 남겼는데.. 고작..치킨 한조각에?'


더 거슬러 올라가면, 먼 조상들이 차가운 물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나타난다. 진화 과정을 거슬러, 그들은 바다에서 천적을 피해 달아났고, 먹이를 찾아 사투를 벌였다. 심지어 단세포 생명체가 온갖 위험 속에서도 생존해 나가며 DNA를 남기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닷속 세포들은 자그마한 생존의 불씨를 이어왔고, 그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시야는 단숨에 다시 남자의 눈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 모든 유구한 생존의 역사와 모든 고생을 넘어온 생명의 흔적들이 그의 부릅뜬 눈 속에 담겨 있다. 모든 조상이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듯하다.


 '이 병신 같은...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그리고, 티브이에선 한결같이 즐거운 웃음소리가 여전히 흘러나온다.


너라는 개체의

                   '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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