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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현 Jan 04. 2025

우리가 가진 걷는 DNA

전라북도 무주

우리가 가진 걷는 DNA / 무주     

10일 차 (4월 11)

진안읍 운산삼거리~용담호~진안 안천면~무주군 적상면 29km / 누적 293km 

    

어제부터 오른쪽 다리 정강이 아랫부분이 붓고 아프기 시작하더니 오늘 10km 정도 지났을 때부터 통증이 심해졌다. 아직 20km나 남았는데 속도가 뚝 떨어졌다. 왼쪽 발가락 물집이 나아졌기에 왼발에 힘을 주며 다리를 절면서 걸었다. 


갑자기 통증이 무척 심하여 멈췄다. 잠시 정강이를 주무르고 일어섰다. 수동터널, 불로치터널, 고로치터널, 조금재터널 네 개를 지나고 구불구불한 장삼재와 오리재와 몇 개의 고개를 넘느라 발걸음이 더뎌졌다. 


산을 통과하는 터널까지는 대부분 오르막길이고, 터널을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곳곳에 2차선 구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라 걸을 공간이 없어서 걷기 불편하고 위험했다. 오늘 도보 난이도는 최상급이다. 

다른 날보다 어려움이 컸지만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하긴 누구나 살다 보면 어려움이 늘 따라다니지 않는가.

     


오늘 지나온 불로치터널과 조금재터널은 세계 오지 여행가였던 한비야 님이 걸어서 지나간 터널이다. 그녀가 7년간 오지 여행한 거리는 지구 세 바퀴 반인 14만km다. 경이롭다. 무엇이 그녀를 걷게 했을까. 나는 왜 다리를 절면서도 걸을까.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등장은 3~4만 년 전이지만, 인류로 분류되는 직립 보행인은 16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상에서 야생의 말을 길들이기 전까지 인류는 두 다리에 의존하여 이동하였다. 말을 길들이기 시작했지만, 말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대중이 이용 가능한 실질적인 대중교통의 탄생은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금부터 200년이 채 안 된다. 


일백오십구만구천팔백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걸어서 이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의 탈것은 소수만 이용 가능했다. 지금도 영남 과거길 등 옛길이 일부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양반들도 과거에 응시하러 한양까지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천릿길을 걸었다. 


우리나라 육상 대중교통의 시초는 1899년 제물포-노량진 철도이고, 버스는 1912년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 국토 어디서나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해진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160만 년 가까이 걷기만 한 인간은 지금도 걷는 DNA를 지닌 것은 아닐까.


내 주위 많은 사람이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는 나에게 “나도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한다. 걷는 게 누구에게 내세울 일도 아니고, 명예나 돈은커녕 힘만 들 뿐인데 왜 걷고 싶어 할까. 


한비야 님의 저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급속한 도시화와 함께 촘촘한 대중교통이 발달하여 굳이 걸을 필요가 없어졌지만. 내면에 잠자고 있던 DNA를 건드렸기 때문은 아닐까. 

한비야 님이나 나도 무의식중에 원시의 걷는 습성이 발동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이모저모


오늘은 터널을 네 개 지났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용담호를 가로지르는 1km가 넘는 월포대교와 용담대교도 건넜다. 


불로치터널을 지나기 전, 용담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전망대에 올랐다. 나무로 만든 2층 높이의 전망대에서 동네 슈퍼마켓용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저 아래 용담호에서 잔물결이 일면서 윤슬이 반짝인다. 호수 주변을 둘러싼 산자락에는 ‘사람’이 사는 집이 안겨있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여 절경을 이룬다. 용담댐으로 생긴 인공호수 물밑에는 소우주가 잠겨 있을 것이다. 한 가정은 소우주다. 거기서 나고 자라서 죽고, 또 태어나고 죽는 대순환의 맥이 속절없이 끊겼지만 민초의 생명력은 지금의 뭍에서 다시 살아났다. 소우주는 죽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지금 천하의 절경에 빠져 도보여행을 즐기고 있다. 옆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옆 사람과 말을 나누면 이 감동이 뭉텅 잘려나간다. 나 홀로 여행의 참맛이 이것이다.


진안에서 무주로 가는 길에는 차량 통행이 잦지 않다. 아침부터 꿩이 노래하고 길가 나무에서 조그마한 새가 짹짹한다. 멀리 날아가지 않고 이 가지에서 바로 옆 가지로 여러 번 옮겨 다닌다. 


얼마 지나 열댓 마리 새들의 죽음이 널려 있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어느 마을 앞에 설치된 성벽 같은 방음용 투명 아크릴판 아래에서다. 참새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새들도 죽어 있었다. 신라의 솔거가 그린 <노송도>에 새들이 부딪혔다는데 이곳에서는 투명 아크릴판을 보지 못하고 날아들다 부딪혔을 것이다. 지나는 차도 드문 산골의 도로변에 이런 방음벽이 꼭 필요할까. 로드킬이야 어쩔 수 없지만 이건 조금 다르다. 월킬(wallkill)인가. 로드킬 당한 짐승을 많이 본다. 심지어 죽은 지 얼마 안 된 뱀도 보았다. 

오늘로 전라북도를 뒤로하고, 내일은 충청북도 영동군으로 들어간다.


4월에는 어디나 벚꽃이 피어 있댜
용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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