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발걸음도 가볍다. 길을 나서며 이내 섬진강 줄기를 따라 걷는다. 임실 관촌은 섬진강 상류인데 다슬기탕 식당이 여럿 보인다. 구례 하동의 다슬기가 유명하다지만 임실도 그에 못지않다. 어제저녁에 맛본 다슬기탕은 일품이었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이웃한 농로를 종종 접한다. 농로는 중간에 끊기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잘못 들어서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 불편을 겪는다. 특히 농수로 옆 농로에 다리가 없으면 낭패다. 스마트폰 지도에 농로가 나와 있지만 주의해야 한다. 오늘도 잠시 농로를 탔다. 차량 소음도 피하고 매연이나 흙먼지도 없을뿐더러 위험하지 않다. 요즘은 농로도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하여 푹신한 맛은 없다.
어디선가 구리구리한 거름 냄새가 솔솔 내 코를 간지럽힌다. 4월이면 밭농사를 시작할 때라 밭에 뿌린 거뭇한 거름을 자주 본다. 농로에서 풍기는 이 냄새가 싫지 않다. 사람이 간사한 건가. 아니면 환경이 나의 후각과 의식까지 바꾸는 건가. 저 멀리 논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벼 베고 남은 밑동에 불을 놓는 것이다.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다가갔다. 논 주인인 늙으신 농부는 불을 정리하고 논에서 나와 경운기 시동을 건다. 아침부터 거름 냄새와 벼 타는 냄새 두 가지로 내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혼자 다니다 보면 나를 반기는 이 하나 없다. 낯모르는 사람을 누가 반기겠는가. 그러나 나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갑다는 인사를 받는다. 개가 나를 반긴다. 어디를 가도 젊은 사람들이 없다 보니 마을은 썰렁하다. 개는 자동차에 익숙해서인지 자동차가 지나가면 짖지 않지만 낯선 내가 지나가면 짖어댄다. 꼬리를 흔드는 걸 보면 사람이 그리워서 일 수도 있겠다. 아까는 한적한 곳을 지나는데 수십 마리 개가 나를 보며 한꺼번에 짖어대었다. 식용으로 사육되는 덩치 큰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니 뒷산이 울릴 지경이다. 단체로 개들의 반가운 인사를 받기는 처음이다.
한 시간 반 정도 걸으며 좌포터널을 지나고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양산교와 좌포교를 건너서 쉬려고 길가에 앉았다. 도로 아래 저편 농가에 묶여 있던 누렁 개와 목줄이 없는 검정 개가 노닥거리는 걸 보았다. 누렁이가 나를 보며 컹컹대며 짖었지만 묶여 있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로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뭔가 시커먼 물체가 내 옆에 다가온 걸 느꼈다. 화들짝 놀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렁이 옆에서 놀던 목줄 없는 덩치 큰 검은 개가 어느새 나에게 바싹 다가온 것이다. 검둥이는 짖지 않았다. 나는 긴장하며 가까이 다가온 개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순해 보였다. 나에게 적대감을 내뿜지 않았다. 안심이다.
그 녀석은 머리와 주둥이를 들이밀며 애교를 부렸다. 배낭에서 어제 먹다 남은 과자를 꺼내 주었다. 정신없이 맛있게 먹는다. 길 가다 풀려 있는 다른 개들에게 내가 오라고 손짓하면 그 개들은 도망갔다. 그런데 이놈은 커다란 꼬리를 흔들어 대며 제 몸뚱이까지 나에게 들이댄다. 과자를 더 꺼내 주며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둥이에게 “앉아”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과자만 달란다. 우리 집 강아지 푸들 두 마리는 앉으라 하면 바로 앉고, “손” 하면 앞발을 내민다. 먹을 것을 주며 “먹지 마”라고 말하면 먹으라는 주인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요즘은 개 키우는 사람들이 애완견을 반려견이라 말하지만, 개의 자유와 본능을 억압하고 있다. 평생을 짝짓기 한 번 못하고 죽는 처녀총각 개들이 대다수 아닌가. ‘반려견’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가식이 묻어난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아이는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사람의 명령 따위는 귓전으로 흘려버리는 자유견 임이 분명했다. 그래, 나도 이 아이와 같이 자유로움을 느끼려 홀로 걷고 있는 것이지. 나와 검둥이는 친구가 된 셈이다. 아침부터 누구와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이 아이가 내 말벗이 되었다. 내 마음과 이 아이의 마음이 통했나 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검둥이가 따라온다. 두어 번 손짓으로 너희 집으로 가라 하여 그 아이와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