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군 적상면~싸리재~압치고개~충북 영동군 학산면~양강면 유점리 29km / 누적 322km
오늘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른쪽 정강이가 심하게 아팠다. 오늘 걸을 거리는 29km다. 다리를 절며 70리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걸어보자. 한 시간여를 걷고 나서 양말을 벗고 보니 발목까지 부었다.
싸리재와 학산재(압치고개)를 넘었다. 본격적으로 내륙으로 들어서며 넘어야 하는 고개의 경사가 급해진다. 압치고개 아래로는 4차선 19번 국도 압치터널이 입을 벌리고 자동차를 토해내고 흡입한다. 도로변에 앉아서 터널을 빠져나와 빠르게 내빼고 들어가는 차량의 흐름을 내려다보았다. 기계를 위한 길이다. 오로지 빨리 가기만 할 뿐이다.
길에는 사랑도 있고 슬픔도 있다. 결혼 전 나는 아내와 청와대 동쪽 삼청공원 길을 자주 산책하였다. 저녁에 연인들은 그 길을 걸으며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나도 그랬다. 내 아버지 어머니를 화장하여 장지로 오르는 길에서는 슬픔의 묵언이 흘렀다. 내 집 근처 당현천 산책로에서 나는 사색에 잠긴다.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2차선 구도로는 단순히 사람과 물건을 이동하는 역할만 하지 않았다. 마을과 마을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었다. 그 길은 동네 남정네와 아낙들의 마실길이었다. 그 길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시원스레 뚫린 4차선 직선도로에는 개발과 속도와 기계음만 들린다. 무엇을 위해 빨리 달려야 할까. 사람을 위해 개발하고 발전한다지만 무엇이 진정 사람을 위한 길일까.
회사에서의 승진 속도 경쟁, 기업 간의 규모 확장을 위한 속도 경쟁, 상대보다 빨리 권력을 잡으려는 속도 경쟁, 남보다 먼저 커나가려는 경쟁과 함께 뻥 뚫린 4차선 도로에서는 앞만 보는 과속 경쟁이 줄을 잇는다. 조물주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인 ‘사람’이 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길에 사람이 소외되고 있다.
오늘도 거리가 짧은 4차선 도로를 외면하고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와 농로를 걸었다. 압치고개 길은 차량 통행이 무척 적다. 내가 고개를 넘을 때 지나는 차량은 한두 대 정도였다.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걷다 보면 오늘 가야 할 길을 염두에 두고 주로 앞만 보고 걸어간다. 내 눈에 보이는 앞의 경치가 전부인 줄 안다. 불과 90도 각도도 안되는 시야다.
그러다 뒤를 돌아본다. 와~ 이렇게 멋있는 풍경이 있구나. 앞에서 보는 것과 다른 아름다움에 놀란다. 분명히 이 길을 지나왔는데 왜 몰랐을까. 산에 오를 때도 그렇다. 앞사람 꽁무니만 보며 오르다가 잠시 쉬며 뒤를 돌아보면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산 아래의 풍광에 저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고은의 시(詩) 「그 꽃」이 떠올랐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나도 오랜 시간 회사 생활하며 앞만 보고 뛰어갔다. 그게 열심히 사는 길인 줄로만 알았다. 옆을 돌아보면서 살면 자칫 낙오로 이어진다. 경쟁에 빠진 현대 사람들을 그 속으로 몰아갔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 삶에서 정작 나 자신은 저 멀리서 ‘나’라고 여겼던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변에 누가 어려움을 겪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과 섞여 살았지만 나는 늘 혼자였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님에게도 혈육으로만 자식이었다. 돌아가시고 난 후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었다. 형제들과도 바쁘다는 핑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들과 대화는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없을 정도였다. 자식들과도 오랜 세월 그렇게 살다 보니 아이들은 훌쩍 컸고, 아이들의 대화와 상담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은 결과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독서실 운영이라는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회사 퇴직한 날짜와 독서실 인수한 날이 같았다. 오전에 회사를 나설 때까지 임원 직함이 나를 따라 다녔는데, 오후에는 학생들이 ‘아저씨’로 불렀다. 아저씨라는 호칭은 생소했다. 정체성의 혼란이 일었다. 가정보다 회사를 우선시하며 앞만 보고 뛰어왔는데 이제 내 사업을 시작하며 ‘아저씨’로 떨어진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하잘것없는 회사생활의 껍데기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때를 벗기려 천주교 피정의 집에 며칠 머물렀다. 남도 절간에도 찾아가 아침마다 새벽 예불에 참례하여 백팔 배를 올렸다. 부처에게 올린 절이 아니라 나 자신을 감싸고 있는 허명을 벗어버리려는 몸부림이었다. 명상, 독서, 글쓰기로 며칠 지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내 딸과 자주 겪은 마찰은 나로 인한 것이었다. 내가 만든 틀에 자식을 끼워 넣으려 했고, 자의식이 강한 딸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천주교 전례의 기도문이다. 모든 게 내 탓이었다. 이후 독서실 학생들의 아저씨 호칭이 자연스럽게 들렸다. 옆도 뒤도 고개를 돌리니 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