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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현 Jan 08. 2025

슬픈 노근리

충북 영동 노근리 (1)

슬픈 노근리 영동 노근리 

    

12일 차(4월 13일)

충북 영동군 양강면 유점리~양강면~영동읍~노근리 평화공원~황간면 25km / 누적 347km     


‘노근리사건’이라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육이오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미군은 인근 마을 민간인 500~600명에게 피난하도록 소개 명령을 내렸다. 소개 도중 소변을 보러 간 사람들과 밤중에 서성이던 사람들은 미군에 의해 그때 사살당했다. 미군은 민간인들을 국도를 따라 이동시키다가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로 가라고 명령했다. 이어 이유 없이 미군 전투기가 민간인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다수가 사망하자 남은 민간인들은 노근리 경부선 철교 아래 쌍굴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대기하던 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바로 옆 작은 굴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어갔다. 미군 전투기의 폭격도 이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노인과 젖먹이와 그 엄마, 어린아이들까지 학살당했다. 2008년 한국 정부 공식 통계로는 226명이 희생되었다지만 당시 신문기사는 약 400명이 희생되었다고 전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에 다가갔다. 다리 밑 커다란 쌍굴 주변과 굴 안에는 흰색 페인트로 그린 동그란 표식이 무척 많았다. 총탄 자국이다. 단단한 시멘트가 움푹 파일 정도로 기관총의 위력은 컸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굴다리 밖으로 기어 나오자 그들은 살상 무기의 표적이 되어 죽어갔다. 굴 안에서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비는 어린 자식의 입과 코를 막아야 했고, 아기는 아비 손에 죽어갔다. 


미군 25사단 사령부는 노근리 인근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당시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할 때였으므로 북한군이 변복하고 민간인 틈에 섞일 상황이 아니었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미군이 대전에서 패퇴하며 미24사단장 월리엄 딘 소장이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자 민간인들에게 보복한 것이라고 한다. 노근리 현장의 미군은 상부의 민간인 학살 명령에 따랐다. 그들의 눈에는 노인과 젖먹이도 적으로 보였다는 말인가. 


1960년부터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지만 5‧16 군사 쿠데타 후 미국의 눈치를 보던 군사정권은 누구에게도 말도 꺼내지 못하게 입을 막았다. 그러다 1994년 김영삼 정권 출범 후 유가족들의 노력으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2004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조사가 완료되었지만, 정부 주도 조사는 아니었다. 


반세기 동안 유족들은 한을 품고 살아온 것이다. 이 땅의 정부는 미국의 대변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사 과정에서 생존 미군 병사들은 발포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지만, 미국은 이 부분을 은폐했다. 아직도 남은 유가족들은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노근리평화공원 안내판 및 생존자 증언 참조). 


학살의 현장인 쌍굴로 들어갔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려 묵념을 올렸다. 이곳에서 우리 부모 형제자매들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처참하게 흉탄에 죽어갔다. 미국이 비록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주었지만, 그들이 자행한 학살은 벌써 오래전에 진상이 규명되어야 했다. 미군의 참전이 순수하게 한국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남하 정책에 맞서 동북아 저지선 구축이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은 다수의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노근리 학살은 그 전초전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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