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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현 Jan 09. 2025

통증과 버스

충북 영동 노근리 (2)

<통증과 버스>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비의 양이 많아지더니 바람까지 분다. 지나는 길이 명색이 국도인데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이고 길 가장자리 내가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태부족이다. 대형트럭도 자주 다닌다.


통증을 참기 어렵다. 이번 도보여행의 최대위기다. 발목과 정강이 사이가 찢어질 듯 아프다. 의사인 친구에게 전화로 물었다. 인대 손상이 우려되므로 반드시 진료를 받아보란다. 인대가 문제라면 즉시 도보를 중지해야 한다. 


내가 이 여행을 위해 어떻게 준비했는데, 얼마나 원하고 원했던 도보여행인데 말이다. 사업장을 한 달씩이나 아내에게 맡기고 나왔는데 이렇게 실패로 끝나는 것인가, 착잡했다. 


이번에 완주하면 내년에는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고자 서쪽 최북단에서 동쪽 최북단까지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 걸으려 했다. 이후 한반도를 동서남북, 대각선으로 걸어볼 참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은 나에게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향후 도보여행의 분기점이었다. 


지금까지 삼백오십 킬로미터를 걸었어도 체력은 충분했다. 물집 잡힌 발가락도 굳은살로 변하여 지장 없었다. 인대만은 고장 나지 말아야 한다. 다리 통증 때문에 발목을 움직일 수 없어서 걸음이 부자연스럽다. 


“한동안 왼쪽 발가락 물집으로 오른쪽 다리가 수고했으니 이젠 왼쪽 다리 네가 수고 좀 하렴.”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걸으며 영동 시내 정형외과를 찾았다.


나라는 인간이 의지가 약한 건지 간사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절실히 원했던 국토종단인데 한편으로는 진찰 결과가 인대 손상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스치듯 지나갔다.


문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안한 잠자리, 내 입에 맞는 음식 등등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고픈 본능적 욕구였다. 내 방에서 풍기는 책 냄새와 잠자리도 그리웠다. 아무리 고통이 심하기로서 이런 생각이 들다니, 여행은 익숙함에서 탈출하는 행위 아닌가. 나 홀로 도보여행을 하면 자유로운 영혼을 만끽하고 우리 산하의 풍광을 구경하며 감동하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엑스레이와 초음파 검사를 한 결과, 다행히 인대 손상은 아니었다. 발목과 그 윗부분에 염증이 심하여 주사와 약물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무조건 휴식을 취하라고 하였다. 염증이 도보여행에 결정적 장애 요인이 아니므로 나는 중단하지 않았다.


통증을 참고 다리를 끌다시피 걷다가 갑자기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걸음을 멈추었다. 목적지까지 9km 남았다. 3km만 더 가면 육이오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현장인 노근리 평화공원인데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버스를 타자. 한참을 기다려 3km를 버스로 이동했다. 


도보여행하면서 세운 원칙이 있다. 탈것을 이용하지 않는다. 단, 도착지에서 숙박이 가능한 읍내나 도시까지 이동은 가능하다. 두 번째, 출발은 전날 도착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오늘 그 원칙을 스스로 깼다. 비바람 속에서 통증도 심하여 지붕 있는 고갯마루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발아래에는 내 집이 있는 서울행 경부선 철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오늘의 이모저모>


노근리에서 황간까지 겨우 걸어갔다. 황간을 끼고도는 초강천 앞 파출소에 다가갔다. 면 단위에서는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기에 마침 파출소 앞에 나와서 담배 피우던 경찰관에게 여관을 물어보았다.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내 행색을 보며 뭐 하는 사람이냐,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등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직업의식이 발동한 것 같았다. 국토종단 중이라는 말을 듣고 태도가 변하며 이제는 도보여행에 관해 묻고 또 물었다. 나는 다리 통증이 심해서 빨리 숙소에서 쉬고 싶었지만, 배낭을 내려놓고 이삼십 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낡은 여관이 깨끗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역시 방 청소가 안 되어 먼지가 굴러다니고 욕실도 침대도 지저분하였다. 그렇다고 옮길 다른 여관도 없었다. 가지고 다니던 초소형 침낭을 꺼내어 침대에 펼쳤다. 방은 따뜻하고 뜨거운 물도 나왔다. 이만하면 괜찮다 싶었다. 통닭이 먹고 싶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보상심리가 발동했다. 한 마리 튀겨와 숙소에서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내일도 종일 비가 온다는데 통증도 가라앉힐 겸 하루 쉬기로 했다. 염증과 통증이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영동은 포도 주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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