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까지 3일째 내린천을 따라 걷는다. 역시 내린천 길은 어디나 비경이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므로 지루하지 않다.
오늘 내린천 길에서 보니 산과 물길이 한 몸이다. 산자락과 물이 껴안고 뒹굴며 사랑을 나눈다. 물은 제 몸을 내던지고, 산자락은 그녀를 감싸 안는다. 그러나 산은 그녀를 내 것이라 고집하지 않는다. 사랑하되 서로를 소유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 존재를 인정하고, 그 또는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닐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내린천은 이곳 인제 합강에 이르러 금강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줄기와 만나 북 소양강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나가 사라지며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이 물줄기는 흐르고 흘러 거대한 소양호가 되고 양구와 춘천을 휘돌아 내려가 북한강으로 합류하며 청평을 거처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한반도 중심 한강으로 다시 태어난다. 내린천의 산과 물의 사랑이 한반도 허리 아랫녘의 주역이 되는 순간이다.
기린면에서 북서 방면 13km 지점 소양강 길가에 ‘38線’이라 새겨진 표지석이 눈길을 끌었다. 일본 패망 후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의 남하에 맞서 미국이 부랴부랴 38선 이남이라도 미국의 패권 아래에 놓으려고 선을 그었다는 설과 일본 패망 전 포츠담 회담에서 이미 한반도 38선이 논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반도는 강대국들 패권 경쟁의 희생물이었고, 38선은 실체적 분단선이었다.
그런데 양쪽을 보니 남과 북 글자 색깔이 서로 달랐다. 남에서 북 방향은 검은색이지만 북에서 남쪽은 붉은색이다. ‘빨갱이’ 단어가 떠올랐다. 6‧25 전후 누구든 ‘빨갱이’로 지목되면 살아남지 못했다. 정상적인 법원의 심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선배 수필가 안규수 선생은 명수필 「손가락 총」에서 여순사건 당시 전남 벌교에서 좌익 산사람들에게 희생당한 가족의 비극을 그렸다. 지휘관이 손가락 총으로 지목하면 그 사람은 형식에 불과한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토벌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토벌대 군인이 손가락 총으로 지적하면 어떤 과정도 없이 즉결 처형당했다.
육이오전쟁 전후 수많은 대한민국 양민이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북측과 남측 모두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에 의한 희생도 억울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원혼과 유족의 한은 땅 밑에 묻혀만 있어야 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진상을 규명하고 사죄하였다. 너무 오래 걸렸다. 붉은색의 ‘38線’을 섬뜩하게 느끼며 38선을 넘었다.
내 아버지도 북에서 공산당을 피해 월남하셨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거실에서 주인공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어울려 이야기할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겨우 피란 내려와 이제는 노인이 된 주인공은 부친을 그리워하며 꺼이꺼이 운다.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90이 넘은 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추석 차례상 앞에서 병환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북에 두고 온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피란 내려와 어떻게 살아왔으며, 든든한 자식들과 손주들 보았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그립다고. 아버지의 한 서린 외침은 오래전부터 명절 때마다 보아왔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로부터 두어 달 뒤 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님을 만나러 멀리 가셨다.
이데올로기란 한낮 허울뿐이지만, 여하튼 내 아버지도 그 잘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다. 어찌 그만 그럴까. 며칠 전 지나온 이승복기념관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나와 동갑인 1959년생 승복은 그의 아홉 번째 생일인 1968년 12월 9일, 울진 삼척에 침투한 북의 무장공비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9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어머니와 두 동생까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 승복은 오랫동안 반공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어린아이가 반공을 외치다 죽었으니, 온 국민은 누구나 그를 본받으라고 당시 정권은 강압적으로 교육했다.
여기에서 나는 승복의 세 가지 비극을 생각해 보았다.
첫째, 어린 나이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제는 승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때는 적군에 의해서였지만, 요즘에는 계모뿐만 아니라 친부 친모에 의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 무참히 죽어간 아이들이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지금은 우리 내부에서 비인간적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다.
둘째, 승복은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었다. 남북 분단이 없었던들 그가 어린 나이에 이토록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을까? 남북 분담의 단초는 1905년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 지배를 서로 인정한 협약이다. 일본 패망 후 한반도 남북으로 미국과 소련이 진주하였고,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남북은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 분단의 책임은 미소 강대국의 패권 경쟁과 북한의 남침에 있지만,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에 일조한 미국도 비껴갈 수 없다.
셋째, 그는 체제 교육의 희생양이었다.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이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나이다.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학교에서 한글을 깨칠 나이다. 1968년, 강원도 산골 화전민의 어린 아들이 북의 공비 앞에서 체제에 대해, 이데올로기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참된 삶을 위한 인성교육을 받기에도 어린 나이였다. 북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철저히 체제 선동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반공보다 극공(克共)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극공 하려면 체제나 이념 교육보다 인간의 존엄성과 진정한 민주주의와 공동체 문화를 교육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승복의 마지막 비극은 어린 나이에 주입된 체제 교육 때문이다.
1975년 박정희 정부는 대관령에 규모가 작은 <이승복 반공관>을 세웠고, 전두환 정부는 용평 운두령 아래 승복의 생가 인근에 규모를 대폭 확장하여 현재의 <이승복 기념관>을 건립했다. 한동안 초중고생들의 단체 견학코스로 지정되어 방문객이 붐비었다. 정당성이 결여된 군사정권에서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는데 이승복도 이용당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승복과 가족의 비극을 잊지 않아야 한다. 지금은 매점도 문을 닫은 지 오래되어 간판도 너덜거린다. 내가 갔을 때 기념관에는 관람객이 겨우 두 사람뿐이었다. 반공이 국시(國是)인 시대는 지나갔다.
<만남과 만남>
내린천을 따라 두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북리보건진료소 진입로가 쉬기 편해 보였다. 잠시 쉬어 가려는데 마침 환자가 없는지 앞마당을 거닐던 긴 머리의 여자 진료소장님이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 묻는다. 사실대로 도보여행 중이라 말했더니 커피 한잔하겠냐며 따뜻한 커피를 내온다. 진료소 앞마당에서 도보여행에 관해 묻고 답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처음으로 사람과 대화하였다. 대화 상대가 없으므로 산천을 주유하며 있는 그대로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인구가 적어 한적한 시골 진료소에는 내원하는 환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바쁘지 않을 때, 지나가는 타지 객의 색다른 이야기는 진료소장님에게 흥미로울 수 있겠다. 종일 말을 나눌 대상이 없던 도보 여행자는 잠깐이지만 타인과의 대화 자체가 피로 해소제가 된다. 따뜻한 커피 인심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