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걸으며 폐가가 자주 눈에 띈다. 농촌이라 슬레이트나 기와지붕 집이 많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 벽은 허물어지고 기둥도 썩으면서 어떤 집은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오늘은 길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슬레이트 지붕이 반쯤 허물어졌고, 남은 지붕을 낡은 기둥 몇 개가 겨우 받치고 있는 폐가를 보았다. 그런데 집 앞 너른 밭에 누군가 작물을 심으려고 로터리 작업을 하여 진갈색의 흙이 물기를 머금고 드러나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폐가 옆에는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나마 적막감을 덜어주었다.
한번은 지나다가 폐가 안으로 들어가 봤다. 그 집은 버려진 지 오래된 듯했다. 기역 자 모양의 기와집으로 방도 여러 개에 작지 않은 규모였다. 담벼락은 무너졌고 문짝은 죄다 뜯겨 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세간이랄 것도 없는 잡동사니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 집도 예전에는 소우주(小宇宙)였을 것이다. 이 집 안에서 밥해 먹고, 잠자고, 싸고, 큰소리치고, 정담도 나누고, 애를 만들고, 애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짝을 만나 떠나고, 살던 이는 죽어 나가고, 그 자식이 대를 이어 사는 순환의 과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제는 그 소우주가 문을 닫은 것이다.
농촌에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의 결과다. 폐가 증가는 개발과 속도 때문이다. 바벨탑을 향한 인간의 욕심은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인간에 의한 개발로 바벨탑이 세워지고 결국 환경파괴와 함께 지구도 소멸로 들어갈 것이다. 속도 조절이 필수라지만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멈출 수 없다. 세상에 영원불멸은 없다. 생(生)이 있으니 멸(滅)이 있게 마련이다. 150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하였으니 언젠가는 우주도 지구도 명을 다할 것이다. 폐가를 보며 가슴은 아프지만, 이 또한 우주 만물의 생몰(生沒) 과정 중 하나라 위안 삼고 싶다.
하긴 사람도 그 자체로 하나의 소우주이니 나서 자라고 늙다가 죽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다. 나이 들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한 이유다.
<슬픈 도시인>
여러 날 시골길만 걷다 보니 도시인의 생활이 떠올랐다. 평생을 제주에서 살다 수년 전 서울로 올라온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집에서 게찜을 요리했다. 제주 같았으면 이웃과 나눠 먹었을 텐데, 서울에서는 음식을 나눌 이웃이 없단다. 이웃과 단절된 도시인이 되어 슬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 사람인가? 누가 나에게 고향을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한다. 아버지 고향은 함경남도 고원군이고 어머니는 경상북도 봉화다. 내가 서울서 태어나서 자랐어도 선뜻 서울이 고향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여하튼 시골의 정취를 모르는 나에게 그가 말한 ‘슬픈 도시인’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등장하기 전, 서울 도심에서 단독 주택에 살았지만, 우리 집에서 별식을 만들었다고 이웃집에 음식을 돌리고, 이웃에게서 받은 기억이 가물거린다. 아파트에 사는 지금은 이사 오는 아래위층 사람들이 리모델링 공사하면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인지 먹을거리를 가져올 때가 있다. 도시는 각각의 사람들을 원룸에 가둔다. 도시인은 갇힌 지도 모르고 산다.
삼십여 년 전 농민운동 하던 형님이 부모님 모시고 여주 시골로 이주하였다. 돌집을 짓고 논농사와 밭농사도 지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자주 주말에 가서 일손도 도우며 시골 생활을 간접으로나마 체험하였다. 한번은 이웃에서 삼겹살 구워 먹는데 와서 같이 먹자며 연락이 왔다. 앞마당에서 불을 지펴 철망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또 한번은 어느 집에서 개 한 마리 잡았다며 초대하였다. 물가에서 이웃 농민들과 함께 먹었다.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기억나는 이유는 이웃과 함께여서였다.
시골길 걷다 보면 저 멀리 산자락에 집 두어 채가 이웃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저들은 분명 음식을 나누고 정도 나누고 일도 품앗이할 것이다.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겠지.
게찜을 나눌 이웃이 없어서 슬퍼하던 그 수필가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도시라는 외로운 그러나 외로운 줄도 모르는 분리 감옥에 갇히지 않는다. “단 열 사람의 의인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리라”라고 신(神)이 약속했지만, 그에 못 미쳐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다고 기독교 경전은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그 수필가 같은 분이 열 명은 넘겠지.
<오늘의 이모저모>
오늘도 내린천을 따라 걷는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았다. 불편해도 우비를 입고 걸었다. 올해도 봄 가뭄이 심해 비가 와야 하는 판에 유유자적 유람하는 주제에 비가 귀찮다고 하는 나는 정신이 제대로 박혔는지 모르겠다.
어제 걸은 내린천 길은 인적이 드물고 오가는 차량이 매우 드물었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심산유곡의 멋을 느꼈다면, 오늘 내린천 길은 드문드문 인가가 이어진, 사람과 산과 물이 어우러진 길이다. 비경은 적지만 빈 곳을 사람이 메워준다. 역시 사람 속에 들어오니 안온감이 든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다.
사람들은 묻는다. 홀로 다니면 외롭지 않냐고. 오래전 회사 다닐 때였다. 대전 출장 마치고 늦은 밤 목포로 가려고 서대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승강장 건너 아파트 창에 비친 불빛을 보며 외로움이 강하게 엄습하였다. 당장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내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홀로 여행 다닐 때는 달랐다. 어느 해 제주 여행하다 해 질 녘 시골에서 저무는 해를 보며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외로움이 달콤하게 다가왔다. 나 홀로 도보여행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인적이 드문 외딴길을 걸을 때면 쓸쓸하다. 그러나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출하여 얻은 온전한 자유로움으로 외로움은 오히려 달콤함으로 변한다. 만약 도보여행이 장기간 계속된다면 외로움은 아픔이 될 것이다. 평소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할 이유다.
상남면 소재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오미재 고개는 경사가 급하다. 해발 500m 정상까지 1.5km에 불과한 고갯길이 아무리 경사가 급한들 얼마나 힘들겠는가만, 며칠 전 넘어온 1,089m 운두령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먹기 나름이다. 고개를 지나서 내린천을 다시 만난 나는 기린면으로 스며들었다.
오늘 20km 정도 짧게 걸었다. 내일 27km 행군을 위한 체력 비축이다. 내일은 내린천을 뒤로하고 소양강 지류를 따라 인제군 인근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