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면서 무릎이 쿡쿡 쑤시고 발목은 굵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파스를 붙이고 다시 잠을 청했다. 피로에 지친 몸도 통증을 이기진 못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기 전 통증 관리는 필수다. 소염진통제 한 알 삼키고, 양 무릎에 파스 한두 장씩 붙인다. 이어 무릎 보호대까지 착용하면 출발 준비 끝이다. 연골 파열로 몇 년 전 시술받아 부실해진 무릎과 발을 두고 이렇게까지 하며 걸어야 하나 싶다가도 걷고 싶은 욕망이 앞서기에 나는 오늘도 단단히 무장하고 또 걷는다.
홍천 내면을 끼고도는 자운천 길을 따라 걷는다. 시내와 멀어지며 물도 맑아졌다.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원당삼거리에서 좌측 인제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구룡령을 넘을까도 생각했다. 이 길로 가면 양양으로 빠져 계속 동해안 길을 걸어야 한다. 단조로운 해안 길보다 산을 넘는 내륙 길을 걷고 싶었다.
지금부터는 내린천과 함께 간다. 이 길로 들어서며 지나는 차량이 뚝 끊겼다. 걷기에는 최고의 분위기다. 길 양쪽으로 오가며 내린천의 절경을 두 눈에 깊이 새긴다. 물소리와 새소리 속에서 도보 여행자인 나는 물이 되고 새가 된다. 물줄기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산이 이어진다. 강이 휘어질 땐 양쪽 산도 같이 휘고, 곧을 땐 같이 곧게 가기에 두 산은 만나지 못한다. 견우와 직녀에겐 오작교라도 있지만, 길과 천(川)이 갈라놓은 산과 산은 서로 그리워만 하는 애달픈 연인이다. 다만 굽이돌며 휘몰아치는 물길이 이쪽 산과 저쪽 산 절벽 바위에 제 몸을 내던지며 오작교 노릇을 한다. 그러다가 길이 다리를 만나 물을 건너자 두 연인인 양쪽 산은 만나서 부둥켜안는다.
정선에서 진부로 뻗은 오대천이 직선의 고속도로라면 내린천은 옛길이다. 말발굽을 위아래로 배열한 듯, 물길 따라 둥근 요철의 휘어진 길이 이어지고, 산과 길이, 길과 강이 그리고 강과 건너편 산이 붙어 있어 한 몸을 이룬다.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된다. 물은 거침없이 흐르다가 돌고 또 돌며 한숨 돌리고, 잔잔한 호수가 되었다가 굽이친다. 조조의 팔십만 대군을 장판교에서 목소리 하나로 물리친 익덕 장비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며 힘차게 달려간다. 나는 내린천에서 객으로 만족한다. 국토종단을 하며 가장 좋은 길 중 하나다.
오래전부터 걷기 열풍이 불었다. 그 여파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번져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간 8천 명 이상이 다녀간다. 비서구권 나라 중에는 단연 1위이다. 나도 작년과 재작년 국토종단을 하며 그 길을 걸으려고 마음먹었다. 올해 3년째 걸으면서 산티아고는 내 마음에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길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 걸은 내린천 길처럼 황홀경에 빠질 길이 산티아고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 산하를 내 두 다리로 디디며 느끼는 감동은 또 어떤가. 산티아고 가는 길이 순례길이라지만 기독교 신앙으로써 의미가 클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며 자아를 찾으려면 어느 길이든 무방하지 않은가. 굳이 물설고 낯선 머나먼 땅에 내 땀을 흘리고 싶지 않다.
물소리와 새소리는 도보 여행자에게 청량제다. 세찬 물소리를 듣고 싶어 물가에 앉았다. 천(川) 양쪽 가장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고, 가운데에 역시 큰 바위가 버티고 있다. 물은 가운데 바위에 부딪혀 한쪽으로는 폭포가 되어 흐르고, 다른 쪽으로는 방향을 틀어 돌아서며 가장자리 바위에 제 머리를 들이박다가 산산이 부서져 밑으로 굽이친다.
쉼 없이 흐르는 이 물줄기에 다툼은 없다. 흐름에 순응할밖에. 사람도 자연의 하나이니 순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남을 욕하는 건 순리가 아니라는데, 뒤를 돌아보니 나도 많은 사람 욕하며 살아왔다. A 씨 B 씨 C 씨 D 씨…… 많기도 하다. 손가락 열 개를 꼽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옳고 그름의 차이를 인정치 않고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른 것으로 못을 박아댔다. 나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지으며 살아왔는가. 누군가의 가슴에는 J 씨로 기억되겠지. 누가 누굴 욕하나. 똥 묻은 내가 겨 묻은 이웃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은 꼴이다.
서울 효제초등학교 동창 셋이 접근성도 좋지 않은 인제 땅에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풍요로웠다. 오늘도 역시 부실하게 먹은 터, 구운 고기가 끝없이 들어간다. 고깃값이 꽤 나왔을 텐데, 친구들에게 미안하며 동시에 고마웠다. 더불어 우리는 오십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집이 가난해 중학교 진학을 못 한 친구 이야기며 등등 1960년대의 종로5가와 충신동으로 우리는 나들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