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토횡단 도보여행을 마치고 무릎 통증이 심하여 병원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퇴행성관절염이 심하다며 나에게 장거리 도보여행 금지 명령을 내렸다. 자칫 인공관절을 넣어야 한단다. 하늘이 반쪽 정도 내려앉았다. 내 삶에서 장거리 도보여행은 너무도 중요하였다. 이번에도 걸으며 무릎 통증이 잦았다. 매일 진통제를 먹고, 파스를 붙이며 걸었다. 이제 내 삶에서 장거리 도보여행은 이번으로 끝을 낸다.
도보여행 중 식사를 제한했다. 아침에는 숙소에서 항상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점심에는 빵과 구운 계란을 먹거나 아내가 준비해 준 얇은 누룽지를 씹어 먹었다. 저녁엔 편의점 도시락이나 순대국밥 아니면 돼지국밥을 주로 먹었다. 17일 동안 걸으며 아침 매식은 없었고, 점심 매식은 두 번에 그쳤다. 하루 평균 25km를 걸어야 하기에 지인들은 나에게 잘 먹으라 충고했다.
내가 식사를 허술히 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혼자 숙박하므로 숙박비를 분담할 수 없다. 기본 경비가 많이 들므로 아껴야 했다.
둘째, 적게 먹으며 많이 운동하여 몸 안에 쌓아둔 과잉 영양을 내보내려 했다. 현대인들의 영양 과다 섭취에 나도 예외가 아니다.
셋째, 장거리 도보여행은 일종의 고행이며 수행이다.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불교의 삼보일배는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끊어내는 수행법이다. 삼보일배에 비해 장거리 도보는 봄바람 맞으며 산책하는 정도이지만, 나같이 유약한 사람에게는 이것도 고행이다. 나를 돌아보는 이 여행에서 배불리 먹고 싶지 않았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생각이 줄어든다.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우리 산하를 내 두 발로 디디며 걷고 싶어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생 후반에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먹을 것을 제한한 셋째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런데 난 뭘 깨달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다만 타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조금은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친한 친구가 나에게 많이 깨닫고 오라 하기에, ‘나도 부처가 될까 보다.’라고 농을 나눴다. 손톱만큼이라도 내 삶에 변화가 있으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왜 걸을까?>
지인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그토록 많이 걸어요? 어떤 분들은 자신과 싸움 즉 도전 정신에 격려를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도전하려고 장거리 도보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땅을 내 두 발로 디디며 걸은 것이다. 산악인은 산이 있어 오른다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길이 있어서 걷는 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산하를 내 두 발로 걸으며 그 속에 잠기고 싶어서 좁다면 좁은 동강 난 한반도를 종으로 횡으로 다녔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하여 자유로움을 얻고자 함이 또 다른 이유다. 자유로움은 자유와 다른 개념이다. 외부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게 자유라면 자유로움은 일상 속의 나, 평소의 나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말한다. 편안한 집과 입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의복, 손에 익은 생업, 배고픔 없는 식생활, 잘 아는 주변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매일매일의 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잠시 가출했다. 물론 편안한 여행도 일상에서 탈출하는 것이지만, 장거리 도보여행은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므로 탈출의 맛을 더한다. 나 홀로 훨훨 날 듯 뚜벅뚜벅 걸으며 생각도 내 마음대로, 풍광 감상도 내 멋대로 한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은 곳에서 잔다. 일상에서의 탈출에 자유가 없으면 일탈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난 늘 혼자 걷는다. 일반 여행도 혼자 갈 때가 많다.
나이 들면 야성이 줄어든다.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고, 나이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진다. 다소 무모하더라도 뭔가 해봐야 후회가 없다. 하다가 몸이 받쳐주지 못해 중단할지언정 부딪혀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걸어 다니는 게 좋아서다. 다니면 모든 게 새롭다. 늘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다니기에 지루할 틈이 없다. 평소에는 새가 지저귀어도 들리지 않는다. 일상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으면 새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걸으며 접하는 모든 게 재미있다. 바로 이것이다. 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