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등고선 주름이 잡힌 산업도로를 벗어나자 깔끔한 김해시가 나타났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한 셈이다. 해반천은 김해시를 남북으로 흐른다. 이 하천과 동행하는 고가(高架) 김해~부산 경전철 밑 천변 길을 따라 걸었다. 도중에 국립김해박물관으로 향했다.
김해는 여러 가야국의 맹주 금관가야의 중심지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해김씨 김수로왕릉은 이곳 김해시 중심에서 1,500년 이상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서 여러 왕릉이 발굴되었다. 역사 왜곡의 달인 일본인들은 일본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며, 역사적 근거를 꿰맞추려 일제강점기에 가야 왕릉을 발굴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의 무덤과는 형태가 전혀 다르고, 가야 문화가 일본보다 월등히 앞선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충 덮었다. 어설픈 발굴은 오히려 우리의 발굴에 방해가 되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에 가려 다소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가야는 왕조 역사가 무려 491년이나 된다. 전 세계적으로 400년 이상 왕조를 이어 온 나라는 흔치 않다. 가야는 특히 철기 문명이 발달했다.
그런 가야에는 왕이 죽었을 때 시종 등 산 사람을 함께 생매장하는 순장의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과연 가야만 그랬을까.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바뀌며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지배·피지배의 신분질서가 형성되었다. 강력한 권력자의 등장과 함께 순장은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권력자는 저승에서도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고, 권력을 승계받은 혈족은 순장을 왕권 강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노동력 감소와 이성의 발달로 순장 풍습은 사라졌다. 일찍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순장 기록이 있지만 발굴된 적은 없다. 가야 고분에서는 순장묘와 인골이 다수 발견되어 가야에 순장 이미지가 각인된 것은 아닌가 싶다. 김훈은 소설 『현의 노래』에서 순장을 앞둔 젊은 여인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역사는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독교 성경 구약에서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정하고 신의 명령으로 먹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이렇다. 소고기나 양고기는 육포로 말려서 보관할 수 있지만, 돼지고기는 당시 기술로 불가능했다. 수천 년 전, 음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더운 중동지역에서 돼지고기 섭취는 자칫 종족의 멸절로 이어지는 위험한 행위였다. 이것을 신의 이름으로 금기했다는 게 현대 일부 신학자들의 이론이다. 논리적으로 수긍이 간다.
고대 가락국의 순장도 당시에는 풍습이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민초에 대한 지배자의 폭력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생명의 존엄과 죽음의 공포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땅을 파고 널을 깐 무덤 자리에 산목숨을 죽은 이 옆에 던지고 뚜껑을 덮어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으니 산자의 고통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왕릉 박물관에서는 죽은 왕의 시신 옆에 산 이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 친절하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발굴 당시 순장자의 뼈 모습도 재현해 놓고 있다. 눈살이 찌푸려지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은 순장자의 고통이나 지배자들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를 위한 산목숨의 순장은 당연하다는 인식을 관람자들에게 주입하는 것 같다. 역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기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지, 재해석이 뒤따라야 과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이어진다. 단지 기록만 보관하는 박물관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의 이모저모>
종일 햇볕에 노출되므로 아침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다. 자외선 차단제의 유효시간이 다섯 시간 정도이므로 중간에 또 발라야 하지만 귀찮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햇살이 무척 강해서 다시 발랐다. 그런데 얼굴이 거칠다. 흙먼지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온몸에 땀이 흘러 엉덩이까지 축축하다. 무릎이 아파서 속도가 느려진 힘든 하루였다.
김해 시내로 들어오면서부터 경전철을 머리에 이고 걸었다. 오늘 도착 예정지도 경전철 평강역이다 보니 경전철이 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 유혹은 내 뚝심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 완벽한 자유로움, 그 달콤함에 빠져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내일은 이번 도보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부산광역시 초량의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을 만나러 간다.
오늘 낙동강을 건너며 드디어 옛 가야 땅 김해를 벗어나 신라 땅 부산에 입성했다. 지난 16일의 여정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쳤다. 어제 봉하마을에서 만난 사람들과 늦게까지 술을 먹다 보니 오늘 아침에 조금 늦게 출발했다. 한낮의 무더위로 일찍 서둘러야 했다. 출발하면서부터 땀이 줄줄 흐른다.
게다가 여기서 김해 시내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인도가 거의 없어 좁은 갓길로 걸어야 하는 4차선 산업도로다. 도로 주변에는 각종 공장이 산재하여 대형트럭의 통행이 잦다. 대부분 과속이다. 굽은 도로에서 대형차가 지날 땐 바짝 긴장하였다. 트럭은 주행차선으로 달리므로 내 옆을 스친다. 눈과 코, 온 전신에 흙먼지를 뒤집어쓴다. 김해까지 10여 km 구간은 이번 도보여행 최악의 길로 기록된다. 그러나 대형트럭이 일으키는 바람에 흐르는 땀을 식힌다. 먼지가 코로 들어가면 어떤가. 나는 시원할 뿐이다. 그럴까?
월남전에 참전한 선배 수필가 말씀이 생각났다. 월남전 때 미군의 고엽제 살포와 비슷해서다. 당시 우리 군인들이 밀림에서 작전 수행할 때 미 군용기에서 뿌린 뿌연 액체를 비처럼 맞았다. 모기도 이 액체를 기피하여 우리 병사들은 반겼다. 물론 고엽제인지 몰랐다. 미군은 밀림 제거와 시야 확보를 위해 베트남 면적의 15%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 독성 물질을 살포하면서도 우리 군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미군의 사전 미고지에 분개하는 그분도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피해를 보았다. 당시 우리 군인들은 고엽제인지 몰라서 반겼지만, 나는 대형차량이 일으키는 미세먼지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저 바람이 시원해서 반겼다. 나도 참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