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이유는 미숙하기 때문이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를 손에 꼽으라면 단연 유호가 첫돌이 될 때까지였다. 나는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해 매번 하나부터 열까지 책이랑 네이버를 뒤지는 것은 너무 지치는 일이었다. 아이는 너무 연약하고(사실 알고 보면 강하다), 해야 하는 일(과 준비물)은 너무 많았다. 젖병 씻다가 하루 다 가는 그 허망하고 피곤한 기분이란. 그 다음으로 힘든 시기는 윤아 태어나고 첫 돌까지였다. 둘째여도 또 다른 인간이기에 이 녀석에 관한 한 나는 또 무지했고, 아이의 기질과 새로운 건강 이슈들에 익숙해지기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육아로 치면 가장 미숙한 그 시기를 나는 지금 내 학문의 여정에서 겪고 있다. ‘연구자’. 비로소 내가 걸치고 싶은 옷의 이름을 찾았지만, 첫 시도는 너무 남루하다.
방법론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고, 프로그램 다루는 것도 모르겠고, 낯선 언어로 된 남의 글은 읽어도 모르겠고, 내 나라 말로 된 내 글을 쓰면서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부스팅을 해서 내내 스팀을 뿜은 머리는 오후 네시면 앞이마가 지끈지끈해진다. 여름 내내 책상 위에서 보낸 시간은 분명 뜨거운 열기 그 자체였는데, 그 결과물은 내가 봐도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여러 밤에는 압박감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압도해 오는 학업의 양과 그에 비해 너무 느린 내 소화력에 두손 두발 다 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아침에 오면 다시 책상에 앉아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무서워서 잠들기가 싫었다. 눈은 빠져라 피곤한데, 정신은 그냥 이 휴식의 시간에 머물고 싶어한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로. 전에 어디서 그런 글을 본 적 있다. 대학원생을 위한 조언... 뭐 이런 글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무서울 땐 어떻게 해야하나? 무서운 채로 그냥 한다’, 이런 식의 글이었다. 뭐 이딴 말이 다 있어, 싶긴 하면서도 내가 겪는 감정이 누군가도 겪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남들은 이 고생을 어떻게 매일 견디는 것일까?
나는 지금 미숙해서 힘들다. 미숙한 것은 챙피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자꾸 창피한 감정이 드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나 혼자 스스로도, 남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도, 나는 끊임없이 비웃음을 당하는 기분이 든다. 가장 못된 시선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것이다. 아무도 나를 멸시하지 않는데, 매번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를 스스로 멸시하지 않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초안을 일단 써서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은, 혹독한 피드백이라도 있어야 그 다음이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러곤 돌아서서 레퍼런스가 수북히 쌓인 책상과 그동안 제쳐둔 집안일이 구석구석 눈에 밟히는 집에 있는 것이 속이 답답해서 집에서 나선다. 뻥 뚫린 풍경이라도 좀 필요하다 싶어서 한 시간 달려 바다에 다녀왔다. 함께 해준 남편과 그런 대화를 나눈다.
“가만 보면 매일을 견디는 가장 큰 동기는 나중에 후회할까봐 무서운 마음인 것 같아.”
나의 모든 어설픔에 매번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 순간도, 한 2, 3년 지나면 별 것 아니었다 느끼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초라한 글을 쓰다 보면 뭐가 초라한지 보는 눈도 생기고, 늘 손에 익은 도구처럼 고민 없이 자료를 다루는 날도 오겠지. 여러 번의 좌절에도 나아지지 않으면 그 땐 그만 다른 옷을 찾으면 된다. 그러려면 후회되지 않는 날들을 꼬박꼬박 견뎌야 한다. 오늘보다 더 힘든 날은 없을 거라며 이 시간이 부디 지나가길 기도하며 보냈던 숱한 육아의 밤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