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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by 수원초이 Nov 28. 2024

몇 달 전에 아이엘츠 시험을 봤다. 아이엘츠는 면접관과 면대면으로 스피킹 시험을 치는데 시험 중에 받았던 한 질문이 잊히지 않고 한동안 마음속에 남았다.

영어능력시험이란 것이 그렇듯 꼭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지식을 자랑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나는 생각을 말로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내가 받은 질문은 굉장히 철학적이고도 나에게 의미 있는(?) 질문이었다. 면접관은 여러 가지 질문 끝에 나에게 ‘사람에게 행복 말고도 다른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행복은 인간이 생존하려는 본능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 그것 자체가 인생의 궁극의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보다도 더 추구해야 하는 것은 생존 그 자체이다.”라고 대답했고, 그 답변으로 내 인터뷰가 끝이 났다.


예상보다 철학적인 질문에 나도 순간 당황을 했고, 웬 궤변을 늘어놓았다 싶어 스피킹 셤 망했다, 고 느꼈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것보단 스피킹 점수가 잘 나왔지만 그 뒤로 한참 그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썩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는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살지 않나?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바라는 최선의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허황된 목표를 좇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때론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왠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무책임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적으로 본다면 생에 닥쳐오는 천재지변을 막을 도리는 없는 법이고, 뇌과학으로 보자면 기질적으로 행복감을 잘 느끼는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감을 느끼고 늘 가볍고 밝은 정서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지만, 나의 그 바람과는 관계없이 이들은 주로 눌린 마음과 우울한 기분과 싸우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나의 행복과 기쁨을 바라겠지만, 정작 나는 많은 시간은 저조한 기분과 약간의 슬픔과 자기혐오를, 그리고 가끔의 시간을 즐거움과 보람과 자기애를 느끼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나의 행복을 최선으로 바란다면 나는 그저 매일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거나, 늘 젊고 건강하거나, 매일 성공적이거나, 매일 극찬을 받거나, 매일 데이트를 하거나 그렇게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만 할 수는 없다. 그건 허상이다. 그걸 바라려면 나는 많은 시간 내가 알고 느끼고 목격하는 모든 슬픔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나를 속여야 한다.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본 적 있다. 자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역사 속의 인류를 지켜보는 것이 벅차다고 느꼈다고. 역사에서 인류가 행한 일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인류의 존엄성을 바라보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그 인류에 속한 것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고. 역사의 비극과 경이를, 인간됨의 그 끔찍한 면과 성스러운 면을, 그 양면성을 동시에 바라보는 작가의 섬세함이었다.

한강 문학을 읽으면서 내가 바로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도 그 양면성이 늘 버겁기 때문에. 인간 삶을 바라보면, 역사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면 나는 영원히 다시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일상에서 마주치는 너무나도 사소한 순간에도 나는 금세 또 미소 짓기도 하는 것이다. 한강 소설은 추악한 것을 눈살이 찌푸려져도 숨기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질문한다. 그것은 마주하기 불편할 정도로 추한 진실이면서도, 눈부신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날 면접관의 질문에서 ‘happiness’라는 단어를 대하고 내가 느꼈던 감정은, 그것은 인간 삶을 다 담아낼 수는 없는 단어라는, 그것이 나에게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본능적인 부정이었을 것이다. 친애하는 누구에게,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래’하는 동화 같은 따뜻한 인사말 정도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이 그 누구의 삶의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정말 아끼는 누군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많은 슬픔과 절망과 외로움과 무섬 속에서도 네가 살아남길 바래.’ 일 것이다.


어찌 됐든 누군가를 내 목숨보다 아끼는 ‘엄마’라는 존재가 되고서, 내가 아이들에게 길러주고 싶은 것은 행복감을 잘 느끼는 방법이 아니다. 일단 내 삶에서 나는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가르쳐줄 능력도 없다. 그것보다는, 살면서 겪을 오만가지의 감정들을 잘 껴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깊다. 가슴 찢어지는 상실도, 실패의 쓴 맛도, 질투하는 마음의 초라함도, 허망함과 짓누르는 부담감도, 딛고 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은 회의와 의심도. 그렇지만 그 와중에 웃을 수 있는 재치도, 소중한 가치를 위한 인내와 결단도, 즐거움과 성취감도, 뜨거운 사랑도. 그리고 물론 달콤한 행복도. 일평생동안 함께 할 이 모든 못생기고 아름다운 감정들과 잘 지내다가, 그렇게 때가 되어 인생을  마칠 때 그 모든 경험이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존재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여전히 그것을 연습하는 중이고, 아이들이 자라 가는 동안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 조금 안심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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