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시작, 45일간의 미국 로드 트립
다음 날 아침, 약간 늦은 9시쯤에 느긋하게 일어나 체크아웃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스타벅스를 찾았다.
오늘은 평소처럼 익숙한 메뉴 대신 뭔가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메뉴판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미국 스타벅스에서는 음료 위에 '콜드폼'을 올려주는 선택지가 있는데, 그 종류가 정말 다양했다. chocolate cream, cinnamon sweet cream, matcha cream, salted caramel cream, vanilla sweet cream, and white chocolate macadamia cream.
메뉴를 잘 몰랐던 나는 가장 만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바닐라 스위트 크림을 추가해 주문했다.
아메리카노의 씁쓸한 맛과 부드럽고 달콤한 콜드폼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음료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하나 꽂히면 일주일 내내 같은 메뉴를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상, 이번 여행 동안 모든 종류의 콜드폼을 다 도전해 봐야겠다는 재미난 계획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편, 기나긴 5일간의 차박을 앞두고 전날 호텔에서 우리의 지출을 점검해 보았다.
미국에 온 지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 그런데 렌터카, 차박 용품, 허기를 달래줄 간식과 식비까지 나름 다 필요한 소비였는데도, 예상했던 여행 예산에 비해 벌써 꽤 많은 돈이 나간 것을 깨닫고 말았다. '우리 이러다 돈 떨어지는 거 아니야?' 하는 농담 반 걱정 반의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의 씀씀이를 좀 더 신중히 관리하기로 다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식비만큼은 어떻게든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식당에서 밥 한 끼를 먹으면 팁까지 포함해 둘이 60달러는 기본으로 나오는 상황. 그렇다고 매일 패스트푸드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패스트푸드도 둘이 먹으면 20~30달러는 나오는 걸 보면, 그렇게 저렴한 선택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론은, 직접 해 먹자!
레이크 타호에서 체크아웃하기 전날 저녁, 식재료를 사기 위해 홀푸드 마켓에 들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유기농 제품 위주로 판매해서 일반 마트보다 가격이 높은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유통기한이 임박한 샐러드와 샌드위치 같은 품목들이 반값에 판매되고 있었다.
결국 우리가 산 건 샐러드 한 팩, 샌드위치 두 개, 그리고 오이 파스타.
놀랍게도 전부 반값이라 네 가지를 다 합쳐도 10달러 남짓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질 좋은 음식들로 두 끼를 해결할 수 있다니! 우린 서로를 보며 "이거 대박 아니야?"라고 웃었다. 앞으로의 식비 전략이 살짝 보이는 순간이었다.
스타벅스를 나와 차를 몰며 포틀랜드로 향하는 길, 점심은 홀푸드에서 산 샌드위치와 오이 파스타로 간단히 해결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음식 맛이 의외로 훌륭했다. 짝꿍과 함께 "이 정도면 앞으로 홀푸드 떨이 코너를 단골로 삼아야겠다!"며 신나게 웃었다. 거기에 식비도 꽤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상상까지 더해졌다.
레이크 타호에서 포틀랜드까지는 약 10시간 거리였다.
긴 여정이지만, 2박 3일 동안 푹 쉬고 나니 10시간 정도는 충분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길을 나선 지 약 5시간쯤 되었을 때, 주유할 시간이 되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작은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다른 주유소보다 기름값이 저렴해서 이곳에 멈췄다. 그런데 기름을 가득 채우는 데 85달러나 들면서도, 이상하게 주유 속도가 너무 느렸다. 기름이 조금씩 들어가는 건지, 85달러가 채워지기까지 무려 20분이나 걸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중간에 짝꿍이 주유소 편의점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원래 그렇다”는 것. 순간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싸다고 들렀는데 시간까지 할인받은 기분이었다.
기름을 다 채우고 출발하려는 순간, 짝꿍이 기름이 샜던 것 같다고 말했다. 큰 문제는 아니겠지 하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이상하게 몇십 마일을 달려도 기름 계기판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갑자기 내비게이션 화면까지 어둡게 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짝꿍은 "이 차를 선택한 것에 대해 불평하고 원래 원했던 차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건가?"라며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나는 이 차를 정말 좋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벌써 정든 느낌이 들어서, 우리의 미국 일주를 이 차와 함께 끝마치고 싶었다.
문제가 빨리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검색에 열을 올렸고, 내비게이션 화면은 초기화를 시도해 보았다. "우리랑 끝까지 같이 가자!"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차에 애정을 쏟았다.
결국 내비게이션 화면은 밝기 조절로 해결했지만, 핸들 앞 계기판은 여전히 어두웠다.
줄어들지 않던 기름 계기판은 갑자기 줄어들더니, 이내 또다시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까지 보여주었다.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일단 계속 달려보기로 했다. 괜히 멈췄다가 시동이 아예 안 걸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틀랜드까지 멈추지 않고 쭉 달리는 걸로 결정했다.
그렇게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길 위에서 배가 고파 전날 홀푸드에서 산 샐러드를 꺼내 먹었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결국 거의 다 버리고 말았다.
50% 세일이 매력적이었지만, 샐러드는 앞으로 절대 사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저녁을 제대로 못 먹은 우리는 포틀랜드가 푸드트럭의 천국이라는 얘기를 듣고 타코를 먹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라 가려던 푸드트럭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게다가 거리에 홈리스들이 많아 스트릿 주차는 부담스러워 유료 주차장을 선택했다.
차에서 내려걸어보니 포틀랜드의 분위기가 묘했다. 날씨는 흐릿하면서도 따뜻했고, 도시 전체는 어둡고 조용한 듯했지만, 클럽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술에 취한 사람들이 어지럽게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푸드트럭 근처에는 홈리스들이 더 많이 모여 있어서 괜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결국 타코를 빨리 주문해서 차 안에서 먹기로 결정했다. 서둘러 주문을 마치고, 10분 정도 기다린 끝에 타코를 받아 다시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계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정신없이 움직였던 탓에 주문한 메뉴가 제대로 된 건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이 타코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유일한 위안이 되길 바라며 차로 서둘러 돌아갔다.
정신없이 타코를 받아 들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잠깐만... 아까 시동 끈 거 기억나?”
짝꿍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던 차의 문제가... 아무 일도 없었다. 시동은 완벽하게 잘 꺼졌고, 다시 걸릴 때도 아무 문제 없이 부드럽게 작동했다.
우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첫인상이 험악했던 포틀랜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짝꿍과 함께 근처 REST AREA로 향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열어본 타코는 $13.5에 이렇게 푸짐하고 맛있어 보였다. 그 가격에 이런 타코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
짝꿍은 배가 별로 안 고프다며 안 먹겠다고 했지만, 타코의 비주얼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나와 함께 허겁지겁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타코를 다 먹고 나니, 어느새 REST AREA에 도착했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잘 준비를 마친 후, 짝꿍과 함께 누워서 포틀랜드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며 잠에 들었다.
내일은 시애틀에 가는 날이다. 시애틀에서는 또 어떤 재밌는 일들이 생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