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레시 ep 6. 나의 고향, 안식의 땅.
리프레시 휴가를 보내면서 잘 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각자의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쉴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매 주말마다, 휴가마다 쉬어보려고 갖은 애를 쓰고도 월요일 아침에 실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일 테다.
휴가 중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는 것은 정말 좋은 경험이지만 그것이 내게 정말 쉼으로 다가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의 답은 아니다였다. 지금도 여행 사진을 바라보며 추억에 젖기도 하고 심심한 위로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몸과 영혼이 완벽히 쉬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왔을 때의 마주한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여행은 좋은 것이다. 다만 리프레쉬의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다.)
휴가 동안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정주행 해본 적도 있다. 일종의 현실 도피인 셈인데, 현실에서 벗어나 타인의 이야기를 보며 즐거움을 얻기는 했지만 나의 전신을 침대에 뉘인 채 꼼짝 않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그것은 일종의 마약 행위와도 같았다. 며칠 밤낮 동안의 나의 몸과 영혼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진정하게 쉬는 것이란 무엇일까. 우연한 기회로 이번 리프레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사랑하는 나의 북한산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게 되었다. 물론 휴가의 첫날부터 진정한 휴식을 위해 애쓴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누워있기도 했고 온 집을 뒤엎어 청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휴가의 중반에 북한산의 둘레길을 산책하게 됐다.
북한산 5월의 낮 풍경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눈부신 동화 속과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동화 속 풍경에 발을 내 디딛었다. 바닥에 비추이는 나뭇잎의 그림자는 길거리를 아롱지게 풀어헤쳐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연극의 무대를 밝히 우는 조명들과도 같았다. 막이 열린 것이다.
눈을 들어보니 올망졸망한 나뭇잎이 수다스럽게도 햇빛 아래 포개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공평하게 통과하는 햇빛은 각자에게 개성 있는 연녹빛 음영을 부여했다. 소란스러웠다. 그 아래로 옹골찬 포도송이와 같이 내리 열린 하얀빛 꽃은 마치 그 축복의 현장 속 열매와도 같이 보였다.
젊음의 생기를 온몸에 흘려보내며 걸어가다 그에 따른 증거와 같은 땀이 맺힐 때면 사--- 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혔고 나무들의 촉촉한 기둥까지 식혀냈다. 나무의 기둥은 뜨거워질 틈 없이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저장했다.
아직 세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풋내기 들풀들은 철 없이 솟아 있었고 그런 잔디를 바라보는 묵묵한 나무들은 인고의 담담한 시선을 그려냈다.
이 한 편의 극을 관장하는 하늘은 시리게 파란빛 안에 더욱 시리게 하얀 구름을 맺혀냈다. 시린 하늘은 폐부를 찌를 듯이 차가운 공기를 풀어냈다. 오장육부가 식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발 끝부터 머리까지 황홀한 풍경이 나를 감싸 안았다. 축복하는 듯한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계곡의 물소리가 나와 이 풍경을 끈적하게 맞붙혔다. 나는 드디어 이 풍경과 화합했으며 알베르 카뮈의 티파사에서의 결혼이 떠올랐다. 나는 나의 고향을 찾은 것이다.
식탁에 앉아서 깜박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뜨겁게 백열 하는 하늘의 갖가지 아롱지는 빛을 붙잡아보려 애쓴다. 땀에 젖은 얼굴, 그러나 입고 있는 가뿐한 천의 옷에 감싸여 서늘한 몸으로 우리들은 이 세계와의 결혼 하룻날의 나른한 행복을 한껏 펼친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나의 고향을 찾는 것. 나의 고향에 돌아와 안식하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물리적 고향인 이 북한산의 길과 또 나의 마지막 비밀인 글 속에서 향유하는 것. 그것이 나의 전신과 정신을 진정하게 쉬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본연의 자기가 되는 것, 자신의 심오한 척도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슈 누아 언덕의 저 단단한 등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가슴은 어떤 이상한 확신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나는 숨 쉬는 방법을 배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을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나의 고향, 북한산에서 나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어떠한 일말의 가면도 꾸며냄도 가장도 없이 온전히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이곳 북한산은 내 고향이니까. 그러한 이 안식의 땅에서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나의 고향에서 진정한 쉼을 살아낸 나는 황홀한 기쁨을 느꼈다. 나의 살아있음이 감사해졌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기대되었고 이전의 고통의 순간이 허물어져 내렸다. 이것이 나의 행복이라면 이것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쉬어야 할지에 대해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들은 어떤 고독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되찾는 고독은 만족감을 동반한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