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 위에 놓인 400분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어떠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by 황태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매일 아침 달릴 때마다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손잡고 같이 산책하는 노부부, 앞 뒤로 떨어져서 걸어가는 중년부부, 편의점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직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는 아기들, 친구들과 함께 수다 떠는 여자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한 공간에 함께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사뭇 생경하게 느껴졌다. 내가 달린 40분의 시간 동안 9명의 40분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산책로 위에서 400분의 시간이 존재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운명에 의해서 이 산책로 위에서 40분을 보내는 것일까? 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한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태어난 것에는 각각의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목적을 위해 삶의 순간들이 직조되어 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산책로를 달리고 있는 것인가?


터무니없게 느껴질 법한 여러 상상들을 하면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 부여된 나의 운명이 있는 것인가?


그때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우리는 왜 각기 다른 재능을 부여받은 것일까.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 안의 20명의 우리 팀원들은 각자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재능을 썩히라고 부여받았을 리는 없을 것이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태복음 21:19)


이번 주 설교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각자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 열매를 맺기 위해 태어났으며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무화과나무가 마르듯이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어떠한 성격의 사람이고, 저러한 재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나의 운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또 열매를 맺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 산책로 위에 400분이 왜 존재했는지 조금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 피아노 청음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내 작고 애매한 재능 중 하나였다. 피아노를 전공할 것도 아닌데 모든 멜로디의 계이름이 들려봤자 뭐가 중요하겠냐는 생각을 항상 해왔었다. 심지어 복잡한 음은 듣지도 못하고 딱 멜로디의 계이름만 들을 수 있으니.


그런데 요즘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멜로디를 청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피아노라는 끈을 쉽게 놓지 못했던 것 같다. 작고 애매한 재능이라도 재능이 있는 것은 맞으니까. 또 멜로디라도 청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습하지 않은 찬송가를 갑자기 쳐야 할 때 무리 없이 칠 수 있었다. 또한 청음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가대에서 알토, 베이스, 소프라노로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재능이 애매했기 때문에 전공을 피아노로 선택하지 않았고 다만 애매한 재능이 아까워서라도 교회 반주를 계속해서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아 그래서 내게는 청음을 할 수 있다는 애매한 재능이 있었고 나는 나름대로 작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구나 깨달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보잘것없고 필요 없는 재능은 없는 것이었다. 다만 재능을 발견했다면 그 재능을 활용해서 나의 운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태어난 것이다.




산책로 위의 400분의 시간 속 40분이 나에게는 매일 나 자신을 정진하고 놓지 않게 하는 시간이다.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기 위해 시간을 몸속에 체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일상 속에 쉽게 매몰되기 쉬운 나의 비밀을 유지하게 한다. 나의 비밀이자 작은 재능인 글쓰기를 놓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서 내가 어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려 한다. 다른 것이 아닌 열매의 질 그 자체에 집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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