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잡시다!
카레닌은 잠에서 깰 때 순수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도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진심으로 이를 즐거워했다. 반면에 테레자는 밤을 연장하고 싶고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욕망 때문에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났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문장은 참 좋아하는 문장이라 여러 번 글을 쓸 때 인용했다. 매번 볼 때마다 살아있는 것에 황홀감을 느껴야지, 주어진 오늘에 즐거워하고 기뻐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자주 인용했던 것도 있다. 너무 좋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체화시키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세상 일들은 잠시라도 내가 나의 온전한 자아를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워하는 순간 또 다른 걱정이 피어오르거나, 즐거움을 발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채로 매번 나의 1순위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래서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나만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에 달리기를 하러 나왔다가 이 문장이 녹아든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하게 됐다.
주말에는 보통 10시간씩 충분히 숙면을 취하고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가 되면 가뿐하게 일어나서 달리는 탓에 그리 힘겹지 않다. 하지만 주중에는 일단 출퇴근과 공부를 한 뒤 피곤한 상태로 6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침 5시 1-20분부터 눈을 떠서 나가 달리려고 하니 정말 쉽지가 않다.
아침마다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자꾸 솟아오른다. 알람을 듣자마자 나와의 갈등 자체를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보자 다짐했지만, 내 무의식이 알람 소리를 귓가에서 지워버린다. 5시부터 5시 25분까지 힘겨운 싸움 끝에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난다. 터덜터덜 준비를 마치고 5시 30분이 되어 달리기 시작하는데 정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산책로 옆 잔디밭에 발라당 배를 까고 정말 행복한 듯이 뒹굴고 있는 개를 발견했다.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네 다리를 공중에 띄운 채 혓바닥을 날름 하고 하얀 배를 좌우로 흔들며 행복해했다.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 나와 그 개 옆을 지나가는 내 자신이 너무나 비교되었다.
저 개는 무엇 때문에 저리 행복해 한단 말인가.
잠에서 깰 때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고 순수한 행복을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경지에는 도대체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방법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메멘토 모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면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놀랍고 즐거울 수밖에 없으니까. 본질적으로 너무나 알맞은 방법이다.
하지만 나의 죽음을 기억하려 한다고 해도 내가 나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이를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 살아있는 것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대가와 과정이 없이 순수하게 차오르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내가 나름의 꼼수로 주목한 것은 잠이다. 주말의 아침이 떠올랐다. 잠에서 빨리 깨어나고 싶은, 주어진 하루가 너무나 감사하고 즐거운 그 시간이 떠올랐다. 비록 매일이 주말과 같이 될 수는 없겠지만, 잠을 충분히 자게 된다면 눈을 뜬다는 것에서부터 순수한 행복이 다가오지 않을까? 그리고 머리에 자욱한 먹구름 같은 피로를 걷어내고 나면 보다 오늘 하루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를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야.
잠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자기 아깝다고 잠드는 시간을 미루고 늦춘다면 다음날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이 반감될 것을 상기해야겠다. 언젠가 카레닌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순수한 행복을 느끼고 천진난만하여 살아있음에 놀라고 기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