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신혼여행과 양가 부모님들과의 시간을 알차게 채우고 내가 아닌 우리는 첫 보금자리가 기다리는 안동으로 간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 도산서원. 답사지로는 최적의 도시인 그곳에서 나는 답사가 아닌 삶을 시작한다.
안동으로 가는 내 마음은 신혼의 달달함과 꽁알꽁알보다는 둘이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내로 산다는 건 어떤삶일까? 이런게 궁금하고 졸업을 하고 하던 공부를 쉬면서 긴 휴식을 해 보겠노라는 다짐이 더 컸다. 그냥 신혼의 시작이 아니라 조건도 참 다양한 첫 보금자리이다. 부대 앞에 5층짜리 군인아파트 몇 동이 모여있는 곳 중에 우리집이 있다. 그 때는 지도검색에도 잘 안나오는 특수 집단의 거처이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군인은 다 같은 군인이 없다.
생김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가 있다면 고개를 끄덕끄덕 할 것이다. 군인이 다 같은 군인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은 군인의 아내도 다 같은 군인의 아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번은 이런일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댁에게 모임에 나오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이제 중위인 남편도 그게 무슨 일인지 몰랐고 나 대신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전달했다. 아무 생각이 없이 했던 이 행동 하나가 마침내 내가 군인아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는 일을 터졌다.
남편들의 월급날은 아내들의 외식이 있는 날이다. 군인도 다 같은 군인이 아니고 장교도 다 같은 장교가 아닌 곳이 바로 내가 한동안 몸담고 살아가야 할 곳이었다. 출신성분 구분하듯이 아내들은 남편의 출신에 따라 각기 다른 식당을 잡아 식사를 하고 단합대회라도 하듯이 매달 그렇게 모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임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소위에 결혼한 경우는 거의 없으니 중위와 결혼한 나는 누가봐도 가장 막내. 나이도 계급도 막내가 나가기 싫다고 했으니 그 말을 전해 들은 윗분들(?)의 반응은 어땠을지 눈에 뻔하다. 우리집 윗층 선배님이 함께 하면 좋을거라고 권하셔서 두 번 거절은 아닌 듯 해서 모임을 나가게 됐고 그 분위기에서 나는 나의 첫번째 거절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건은 연달아 터졌다. 하지만 뭘 모를 때 해야 화가 덜한 법이다. 첫 모임에 나는 호칭에 대해 전해 들은 바도 없었고 단 한번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대화을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실수를 몇 번을 했었나보다. 갓 새댁인 나와는 다르게 거의 모든 선배들은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다. 누구엄마가 너무나 당연했기에 나는 소령 사모님께 아이의 이름을 듣고는' OO엄마' 라고 불렀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차안에서 선배님이 내게 건네는 한 마디. "그렇게 부르면 안돼~ 다음에는 사모님으로 불러요~"
아!!!!!! 뒷통수 빡!!!!! 엄청난 실수를 했구나!라는 것보다 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곳이구나!!!
같은 군인의 아내지만 나름의 서열이 있는 곳. 호칭마저도 구분되는 곳.
안동은 처음으로 그걸 알려주고 앞으로 잘 살아가게 해 준 곳이다.
손놀이, 손공장 돌리기, 손으로 사부작 거리기 좋아하는 나는 결혼 전부터 비즈 재료를 사서 그 시절 핫했던 싸이월드에서 판매를 했던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손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해 본 적은 없지만 보고 만드는 것을 어려워해 본 적도 없다. 서열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와 가까워 지는 방법은 함께 잘 녹아드는 것이다. 선물을 받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특히나 핸드메이드 선물을 받고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물론 그 정성을 알아주는 이들이라면 그 정성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나는 4층에 살았다. 너무 독특해서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사는 아랫집, 윗집, 옆집의 남편들은 모두 같은 성씨이다. 흔하지 않은 성씨라서 이렇게 기억을 하는 듯 하다. 아무튼 그 중 윗집 선배님과 옆집 중사님아내와 친해진 덕에 다른 분들과도 친분이 생겼다. 친분이 생겼다는 것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 오전부터 내 시간보다는 만나서 커피와 수다타임이 생겼다는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에는 학교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책읽고 공부하고 커피마시던 내가 이제는 그야말로 아줌마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아가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엄마들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에 감히 내가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도 내가 만든 것을 선물을 할 수 있을 만큼 조금 친해진 군인아내들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중에 한 명은 내가 호칭 실수를 했던 분이다.
역시 경제력은 아줌마들을 따라 갈 수가 없다. 선물로 받은 비즈 키링이 너무 예쁘다며 만들어서 팔아보자는 것이다. 대충의 기약은 있으나 언제 어디로 이동할 지 모르는 군인아내들에게 새로운 놀잇감이자 부업이 생긴 것이다. 짧게나마 삶의 순간을 같이 보내는 시간 동안 그렇게 인연이 되고 추억을 만들었다.
부업이 말이 좋아 부업이지 가판도 없이 박스 몇 개를 쌓아두고 그럴 싸한 천으로 덮은 뒤 잠자리 모양 열쇠고리, 목걸이, 귀걸이를 올려 두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래도 안동시내 번화가에서 좌판을 펴고는 호객행위조차 제대로 못했지만 마음씨 좋은 안동 사람들은 좌판을 깨끗하게 비워주었다. 다 팔린 것에만 너무 좋아 나름의 정산을 하고 보니 다섯 명이서 하루 종일 벌어들인 순이익은 5만원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즐거워했고 그날 그 돈은 안동찜닭으로 아줌마 다섯의 배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무엇을 배우기에도 시작하기에도 애매하게 주어진 나의 안동생활. 또 다른 놀이를 찾던 중 평상시 라디오 듣는 걸 좋아하던 내가 지방 방송 라디오를 켰다. 안동MBC에서 일주일 한번 일일DJ 코너를 하나 만든다는 광고가 나온다. 고등학교 때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나는 사투리도 안 쓰고 발음도 정확하게 해 보겠다고 볼펜을 입에 물고 연습을 했던 적이 있다. 불연듯 그 때 기억이 나며 이거라도 도전해 보자는 마음이 들어무조건 신청했다. 작정보다 더 빠른 것이 무작정이고 더 열정적인 것이 무작정이다. 그렇게 무작정 신청서를 넣었다.
DJ가 직접 대본을 써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서 그런 지는 몰라도 많이들 신청을 안했는지 금방 연락이 왔다. 대학때 영화대본을 쓰게 해 주셨던 레포트 숙제덕분인지 그 깔짝때는 글실력으로 대본을 완성해서 DJ에 도전. 나 혼자가 아닌 늘 함께였던 다섯 아줌마들에게 새로운 놀이가 생긴 것이다. 물론 5명의 대본은 늘 새댁의 몫이었이었다. 매주 한 명씩 돌아가며 녹음을 했고 그렇게 우리는 5주를 라디오에 귀기울이고 설레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사실 그 코너가 끝나갈 쯤 작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동 MBC 리포터를 하실 생각이 없냐고 전화가 왔다. 눈물을 머금고 거절이 아닌 거절을 할 수 밖에 없는 나는 군인의 아내다. 1년도 머물리 않고 이제 곧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앞두고 있는 나는 군인의 아내였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군인 아내 놀이는 꽤나 즐거웠다. 그러니 지금도 웃으며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