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8 댓글 1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하루키님께 보내는 편지

'반딧불이'를 읽고 나서.

by 호수공원 Mar 09.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반딧불이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218쪽 >



하루키 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 살고 있는 ‘브런치’라는 사이트에서 ‘호수공원’이라는 작가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루키 님께 편지를 쓴 이유는 ‘브런치’ 세상 안에서 마주한 작가님을 통해 하루키 님과 만나게 되었어요. 아주 오래전 하루키 님의 소설을 보고 참 오랜만이었죠. 어느덧 중후한 나이가 되어 하루키 님의 작품을 본다면 세월이라는 것에 대한 무상함, 이전과 다른 무엇의 상념들이 저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날, 하루키 님의 작품 중 제가 선택한 작품은 ‘반딧불이’라는 책이었어요. 여섯 개의 단편 소설의 묶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기 전, 저는 하나의 치즈 케이크를 생각했어요. 풍미가 좋고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치즈 케이크를 여섯 조각으로 잘라 하나씩 꺼내 먹는 재미로 이 책을 읽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반딧불이’의 단편 소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였어요. 이 작품 바로 앞에 있는 ‘헛간을 태우다’라는 작품에서 나오는 등장인물인 그가 헛간들을 태우면서, 또 다른 등장인물인 그녀는 사라지고 없어져요. 미제의 살인 사건을 보는 듯 미스터리 한 여운이 남겨진 작품이라, 다음 작품인 이 작품이 저에게는 좀 무섭게 느껴졌어요.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주인공인 ‘나’는 공에 맞아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사촌 동생을 데리고 간 병원에서 몇 년 전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나와요. ‘나’는 친구와 함께 그 친구의 여자 친구의 병문안을 가기로 해요. 그 여자 친구는 가슴에 한쪽 뼈를 맞추기 위해 가슴 수술을 했다고 했죠. ‘나’는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가슴 속살을 조금씩 훔쳐보기도 해요. 그녀는 방학 숙제라며 ‘장님 버드나무’라는 시를 써요. 그 시의 내용은 장님 버드나무와 여자가 나오는데, 장님 버드나무는 꽃가루를 묻힌 파리가 여자의 귓속으로 들어가 여자를 잠재운다고 했죠. 그리고 그 여자를 찾아 젊은 남자가 언덕을 올라 가는데 그 여자의 몸은 파리가 다 먹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팔 년 전 일, ‘나’의 친구인 그가 죽었다고 나와요. 그리고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사촌 동생을 보며 예전에 그녀가 쓴 시에 나오는 파리들이 사촌동생의 귀를 갉아먹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나'는사촌동생과 병원 밖으로 나오면서 이야기는 끝이 나요.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의문점이 많이 들었어요. ‘헛간을 태우다’의 바로 다음 작품이라 이 작품 또한 미제의 살인 사건일 수도 있다는 잔혹한 상상을 하게 되었어요. ‘나’의 친구가 죽은 건 ‘나’로 인해 죽은 것일까? ‘나’는 순간순간에 끊기는 듯한 기억을 가지고 사는 인물이고, 사람의 통증이나 감각조차 잊는 그런 사람이에요. 아마 저의 상상 속의 그려지는 ‘나’는 친구의 여자 친구인 그녀를 겁탈하려다가 그것을 본 그(나의 친구이자 그녀의 남자 친구)와 몸싸움을 벌이다 그를 살해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어요. 그 증거로 ‘나’는 감정 제어가 안 된다고 하였고, 바닷가에서 여자 옷을 벗긴 적이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가슴을 몇 번씩 훔쳐보았어요. 끔찍한 일을 행하면 그 순간의 고통을 삭제하듯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그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기억이 아닌 필름이 툭툭 끊기듯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죠. ‘나’는 사촌 동생을 병원에 데리고 가는 버스에서도 그가 고등학생 때 늘 타던 버스인데, 그 버스에 노선을 헷갈릴 만큼 그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아요. 부분, 부분의 기억이 그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에요. 


‘장님 버드나무’ 시에 나오는 잠자는 여자가 바로 ‘그녀’이고 그 여자를 잡아먹은 파리가 주인공인 ‘나’이고 여자를 구해줄 젊은 남자는 ‘나’의 ‘친구’인 것처럼 말이죠. 그 시를 통해 이 소설의 전체적인 암시가 그려진 것이 아닐까요? 조심스레 추측을 해보았어요. 아마도 ‘나’의 사촌 동생의 한쪽 귀가 안 들리는 것도 ‘나’로 인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들어요. 감정 제어가 안 되는 사람이니 어떠한 이유로 사촌 동생에게 아주 세게 공을 던졌거나 크기가 묵직한 것으로 던졌을 거라고 생각돼요. 그 충격으로 사촌 동생은 쓰러지고, 그전에 기억을 다 잊은 것처럼... 저도 어릴 적 집안 어르신들이 크게 싸우는 것을 보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어요. 그 후, 그 기억으로 하루하루를 산다면 너무 불행한 일이지만, 쓰러짐과 동시에 그 기억들이 다 지워져서 아무렇지 않게 집안 어르신들을 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은 몇 년이 지나 돌아왔어요.     

하루키 님께서는 새 하얀 캔버스에 스케치하고 어떤 색을 칠하든 색칠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으신 거겠죠? 저는 ‘헛간을 태우다’와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작품을 읽으며, 제가 애초에 먹기로 한 치즈 케이크를 한 조각씩 두 조각을 꺼내 입에 넣긴 했지만 다 먹진 못 했어요. 아무런 토핑도 없는 치즈 케이크가 목에 걸려 메인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치즈 케이크의 달큼함인지 하루키 님이 쓴 소설에 매료되었는지. 저는 다음날, 또 다른 한 조각의 치즈 케이크를 입에 넣었어요.     


춤추는 난쟁이’ 이 소설은 그림 형제가 남긴 ‘신데렐라’의 숨겨 놓은 이야기처럼 잔혹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어떤 찝찝함은 남지 않아 이 조각의 치즈 케이크는 다 먹었어요. 

세 가지의 독일환상’에서는 소설 도입부에 바로 ‘섹스’라는 말이 나오죠. 근데 저는 웃음이 터졌어요. 주말이라 남편이 집에 있었어요. 남편은 가끔 불경을 틀어 놓고 자신이 스님이라도 된 듯 불경을 읊조리곤 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어요. 청렴한 스님과 소설 도입부의 첫 단어와는 너무 상극이었고, 그 아이러니한 부조화 속에 웃음이 터져 나왔던 거 같아요.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던져 준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작가님의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이었어요.      

다시 하루키 님의 작품 속으로 들어갈 시간, 마지막 작품인 ‘비 오는 날의 여자 #241, #242’는 쓸쓸함과 결핍이 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주인공의 무심함이 그녀에게는 무시와 냉대함으로 또는 그 어떤 이유로 그녀의 자취를 사라지게 만들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그녀를 생각하며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타인일지라도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서로가 불편하지 않는 약간 거리를 두는 듯한 적당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반딧불이’는 저한테 참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이 소설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죠.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던 '그'와 그의 여자 친구인 '그녀'와 이렇게 셋이 어울렸어요. ‘나’의 친구인 그는 안타깝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그 후 ‘나’는 대학생이 되어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인 그녀와 종종 만나기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가 아무런 말 없이 통곡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안아주면서 다독여 주다가, 결국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요. 한참 후 연락을 했던 그녀는 병원이 아닌 요양원에서 생활한다며 편지를 써서 ‘나’에게 보내요. ‘나’는 이제 ‘그녀’마저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깊이 슬퍼해요. 얼마 후 ‘나’는 병에 담긴 ‘반딧불이’를 룸메이트를 통해 받게 되고, ‘나’는 그 반딧불이를 옥상에 가져가서 풀어 주어요. 기운이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반딧불이는 한참 후에 그 특유의 빛을 내며 힘껏 날아올라요. 그 모습을 본 ‘나’는 깜깜한 세상 속에 한 줄기의 작은 빛을 보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나요. 반딧불이의 작은 빛은 어둡고 슬픈 ‘나’의 삶의 한 줄기 빛을 준다는 점에서 뭉클한 감동이 느껴졌어요.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하루키 님은 ‘반딧불이’ 소설 속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죽음이 우리를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하루키 님의 생각 속에 머무는 죽음에 대한 정의일까요?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지 삶을 마무리 짓는 지표로 삼는 사람들도 볼 수 있어요. 저는 아직 죽음에 대해 의연한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입장이라서(저에겐 어린 딸과 아들이 있어요.) 생각하면 걱정만 앞서는 삶의 일부분이 되었어요. 어제는 딸아이와 ‘인어공주’를 보았어요. 비극적으로 끝난 이야기에서, 딸아이는 의외로 재미있었다고 했어요. 저는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어?라고 물었더니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인어공주가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재미있었어.” 죽음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와닿지 않은, 7살 아이라서 ‘물거품’이라는 것에 상상의 날개를 달아 우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었어요. 순간 제가 ‘반딧불이’를 보며 저만의 상상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 생각이 났어요.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반딧불이'는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반딧불이’로 환생하여 주인공의 곁에서 한 줄기 작은 빛으로 위로해 주지 않았을까? 어쩌면 ‘반딧불이’는 사람이 죽으면 환생하는 벌레로, 저 멀리 우주까지 날아가서 초록별 은하수가 되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깜깜한 어둠 속에 내려와 슬프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 특유의 ‘초록빛’을 선물해 주는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어쩌면 이건 제가 바라는 상상일지도 몰라요.

 

저에게 하루키 님을 마주하게 한 그 작가님이 남긴 작품에서는 당신의 상상력이 좋다며,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저는 그 상상력이 뭘까? 곰곰이 생각하며 작품들을 보았어요.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제 상상력이 반짝 거리며 빛나는 반딧불이처럼 하늘을 날아오른 것 같아요.

진심을 가득 담아 감사드려요.

하루키 님! 포근한 봄이 다가옵니다. 따스한 날들 속에 평온이 깃드시길 바랍니다.


                                                                                             -2025. 3. 9. 당신의 독자로부터-    


 

<어둠 속의 반짝이는 반딧불이><어둠 속의 반짝이는 반딧불이>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