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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시린 Nov 13. 2024

브리콜라주가 정답이다

CEO를  위한 주역


깔끔, 쫄깃한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윤○○ 선배에게 점심을 청했다. 종로 1가 르메이에르 빌딩 앞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빌딩 지하 ‘장호 왕곱창’ 김치찌개의 맑은 국물을 생각하면서 건물 앞을 서성이는데, 어느 벽에 ‘피맛골’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젠 르메이에르 빌딩 옆 좁은 회랑으로, 흔적만 남은 피맛골이다.

    

피맛골은 말(馬)을 피하려다 생긴 골목이다. 말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드나드는 고관대작이 타 있었는데, 종로 상인들은 그들이 올 때마다 절하는 게 번거로우니 큰길의 뒤쪽으로 피해 버렸다. 그렇게 형성된 골목길엔 목로주점이 들어서고, 모주와 국밥을 파는 식당이 만들어졌다. 희귀한 탄생 설화를 지닌, 전 근대의 이 골목길은 불과 일이십 년 전까지도 건재해, 종로의 피맛골은 '모던 서울'을 헤치고 온 50~60대들에게도 가까운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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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피맛골은 비좁았고 반듯하지 않았다. 꾸불꾸불한 골목길은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의 지친 마음을 달랬다. 비좁았고, 꾸불꾸불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 모른다.


피맛골은 도시 계획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말과 고관대작을 피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들에게 술과 밥을 팔던 사람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만들어졌다. 좁은 이면도로에 조그마한 가게들이 들어서고, 그게 수십 미터, 다시 수백 미터로 연장된 후에 그중 일부만 살아남아 형성됐다. ‘계획’으로는 조성할 수도 없었고, 조성됐다 한들 유지되지 못했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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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이 아니어도, ‘일’은 늘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모든 정보를 취합해 놓고, 그걸 합리적으로 조합해 고심 끝에 만들어 계획은, 있어 보일진 몰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만약 꾸불꾸불, 엇갈린 길로 이뤄진 전근대의 공간을 불도저로 다 밀어 버리고, 오차 없는 격자형의 도로와 주거/사무 공간으로 채운다 생각해 보라. 사실, 생각할 것도 없긴 하다. 지금 서울 시내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으니까.


국적도 정체성도 없는 도시다.

점심과 저녁 시간에만, 급격히 불어나는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만들어진 부자유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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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은 상가 조성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기능을 세분화한 뒤 만들지 않았다. 절 하기 귀찮아 골목으로 숨어든 사람들에게 생기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제 갈길을 가는 사람들과, 제 일로 바쁜 작은 공간들이 만나면서 만들어졌다.      


이런 걸 경영학에선 ‘휴리스틱’이라 한다. 정보도 별로 없고, 합리적인 계획이 불가능할 때, ‘보이는 대로’ 있는 재료를 가져다가 무언가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보이는 대로’가 바로 ‘휴리스틱’의 뜻이다. 어원을 거스르면, ‘발견’이란 의미가 떠오른다.


미술에선 그게 ‘브리콜라주’다. 주위에서 눈에 띄는 헝겊, 종이, 못 등등 쓸 수 있는 재료들을 집어다가 예술 작품으로 응축시키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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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64괘 시스템도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무질서하게 방대해진 고대의 점사(메시지)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아다가 64개로 분류하고, 그걸 다시 8개 카테고리로 줄이고, 8개의 카테고리에 포섭된 재료들을 다시 음과 양 두 가지 요소로 환원했다. 신비한 듯, 전혀 신비할 게 없는 체계다.    


주역의 메시지들은 여전히 무질서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 분류는 헐겁다. 주역 내부로 뚫린 길들은, 꾸불꾸불하고 반듯하지 않다. 주역은 피맛골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메시지들의 혼잡한 네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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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유형의 출판사 사장을 경험했다.      


한쪽은 페미니즘, 경제적 평등 등등 시대정신과 어젠다를 먼저 붙잡은 뒤에 그에 맞는 콘텐츠를, 이어 그런 콘텐츠를 창조할 수 있는(사실은 주문 제작할) 작가(라기보다 대필자)를 찾는 사람이었다.      


다른 한쪽은 그냥 이런저런 작가들을 밥자리에서, 술자리에서 만나면서 그들의 관심사를 귀담아듣고, 그걸 발전시켜 책이 될 수 있게끔 독려하는 이들이다.  


베스트셀러도, 또 다른 흥행 아이템도 피맛골이 형성되듯 탄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과 상품/서비스여야, 피맛골처럼 세월을 이긴다.  거창한 화두를 붙잡아 그로부터 현란한 계획을 연역해 내는 방식은, 고귀할진 몰라도 남는 장사로 이어지진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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