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부장님,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활기찬 ENFP인데, 부장님은 딱 봐도 논리적인 ISTJ 같으세요!”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마시다, 김 대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요즘 젊은 직원들에게 MBTI는 혈액형이나 별자리점을 넘어, 거의 과학의 영역인 듯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컵을 만지작거렸다.
“글쎄… 그게 좀 복잡한 문제라.”
내 애매한 대답에 김 대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문득 50년 전,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유형’이 결정되던 그날 아침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배정을 발표하던 날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번호를 호명하고 있었다. “24번 P고, 25번 G고…” 우리 집은 숨을 죽이고 있었고, 내 번호가 G고에 호명되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단 한마디를 내뱉으셨다. “나가 죽어라.”
P 고는 명문이었고, G 고는 소위 ‘똥통’ 학교였다. 내가 P 고를 원했든 G 고를 원하지 않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뺑뺑이’라는 무작위 추첨은 나나 나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나에게 ‘G고 학생’이라는 첫 사회적 라벨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입학한 G고의 독일어 시간. 키는 작았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던, 베토벤 같은 머리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장난기 가득해 보이던 미소와는 달리, 그의 첫마디는 선전포고였다. “매월 20문항의 시험, 17개 맞추는 놈부터 한 문제당 한 대씩이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매월 시험이 끝나면, 교실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는 얇은 자로 손등을 때리고, 약 0.5초간 살에서 자를 떼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이 고통을 배가시켰다. 3월, 4월이 지나자 독일어 시간은 그 어떤 과목보다 진지해졌다. 나는 맞기 싫다는 일념 하나로 독일어를 외웠다. nach, mit, seit, von, zu, aus, bei, , , …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독일어 전치사들은 내 뇌리에 선명하다.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Sein과 Sollen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셨다. Sein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be)이고, Sollen은 ‘~해야만 한다’는 당위나 의지(should)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나는 독일어가 좋아서(Sein) 공부하는가, 아니면 매가 무서워 ‘해야만 하니까’(Sollen) 공부하는가.
나는 김 대리에게 내 MBTI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회사에서 정식으로 검사했을 땐 INTP, ‘객관적인 분석가’가 나왔어.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내 역할에 맞는 가면이었으니까.”
“역시, 논리적인 T가 맞으셨네요!”
“그런데 몇 년 전에 인터넷으로 다시 해봤더니, 이번엔 INFP가 나오더군. ‘열정적인 중재자’.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고, 사회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왔어.”
김 대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T랑 F는 완전 반대인데. 성향이 바뀌셨나 봐요.”
성향이 바뀐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Sollen의 가면을 쓰고 MBTI 검사에 임했는지도 모른다. ‘회사 부장이라면 이래야 한다’, ‘가장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당위성이 나의 본질을 덮어버린 것이다. 분석적이고 냉소적인 INTP는 나의 Sein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고 내가 연기해 온 Sollen의 모습이었다.
사물이나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본질과는 다르게, 학습과 훈련으로 만들어진 습관의 총합이었다. 독일어 전치사를 외웠던 것처럼, 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해야만 하는’ 역할들을 암기해 왔다. 그 거대한 괴리감으로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던가.
나는 씁쓸한 커피를 넘기며 맞은편의 김 대리를 보았다. 자신의 유형을 확신하는 저 젊음이 부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김 대리,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나의 Sein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나를 둘러싼 세월과 경험이라는 포장지가 너무 두껍다. 이제 와서 그 속살을 드러내기도, 나 자신이 그 맨얼굴을 마주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나는 평생 나 자신에게 가장 위선적인 사람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INTP도, INFP도 아닌, 그저 Sein과 Sollen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로.